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15>

제6절 싸우지 않고 거란의 3개 관문(關門)과 3개 주(州) 획득 (01)

오대십국시기의 혼란상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울분을 느낀 세종은 천하평정의 의지로 불탔다.

남당을 귀속시키고 회남을 수복한 그는 다음 공격목표를 거란이 점유하고 있는 ‘연운16주(燕雲十六州)’로 돌렸다. 이 땅은 20여년 전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할양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후주는 북쪽 국경에 구멍이 뚫리고 방어에 피동적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세종은 반드시 잃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땅을 수복하지 않으면 후주의 안전보장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연운16주’란 유주(幽州), 단주(檀州), 계주(薊州), 영주(瀛州), 막주(莫州), 탁주(涿州), 순주(順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운주(云州), 응주(應州), 환주(寰州), 삭주(朔州), 위주(藯州)이다.

 

959년 3월 하순, 세종은 친히 군사를 통솔하여 유주를 진공하기 위해 북상했다. 후주군은 대군을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시위마보군부지휘사 한통(韓通)은 육로군 주장을 맡아 마보군을 통솔하고, 전전도지휘사 조광윤은 수로군 주장을 맡아 수로로 북정하도록 명했다. 전에 세종이 이미 북운하를 건설했기 때문에 대군은 배로 군량을 수송하면서 영주와 막주로 진군했다.
 
4월 창주에 당도한 세종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국경 관문으로 향했다. 수로군 주장 조광윤의 독촉 하에 후주대군과 세종은 배를 타고 물의 흐름을 따라 북상했다. 길게 늘어선 함대는 수십 리에 달했고 기세가 충천하고 장관을 이루었다.

4월 26일, 조광윤의 군대는 익진관(益津關)에 당도했다. 익진관을 수비하던 거란장수 종정휘(終廷輝)는 후주군의 호호탕탕한 기세를 보고 겁에 질려 성과 함께 항복했다. 후주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의 중요한 요새를 점령했다.

익진관에서 서쪽으로 가려면 수로가 점점 좁아져서 큰 배가 통과할 수 없었다. 조광윤은 병사들에게 배를 버리고 보행하도록 명했다. 그 이튿날 육지로 올라와 서진하던 세종은 야외에서 숙영했다. 그때 호위대는 5백 명도 안되어 수행한 관리들이 공포에 떨었다. 거란기마병이 무리지어 세종의 숙영지 주위에 출몰했다. 그러나 조광윤이 기마병을 급파해 보호했기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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