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조광윤이 먼저 와교관(瓦橋關)에 당도했다. 와교관을 수비하던 거란의 요내빈(姚內斌)은 호랑이 같이 용맹한 장수였다. 그래서 와교관을 공격하다가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으로 판단한 조광윤은 그가 관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요장군(姚將軍), 우리 두 군이 맞붙으면 쌍방이 다 인명 피해가 크게 될 것이오. 전국(戰國)시기 노(魯)나라와 추(鄒)나라가 싸울 때 장수는 30명이 죽었어도 병졸은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들었소. 오늘 우리도 장수끼리만 싸우고 병사들은 참전시키지 맙시다. 어떻소?」
이에 동의한 요내빈이 다가와서 결투를 시작하려 하자 조광윤이 또 말했다.
「거란은 고비사막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여유를 즐겨왔소. 석경당이 도(道)를 어겨 연운16주를 거란에 넘겼고, 그 후 거란은 밭농사를 하면서 국경을 지키느라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소. 오늘 진노한 중국은 연운(燕雲)을 잃은 수치를 씻기 위해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왔소. 거란이 저항한다면 피가 강을 이루고 백만 시체가 떠내려갈 것이오. 항복하고 잃은 땅을 돌려준다면 피를 흘리지 않게 될 것이니 큰 덕을 쌓는 게 아니겠소?」
이에 마음으로 굴복한 요내빈은 와교관과 함께 항복했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에서 제일 좋기는 “싸우지 않고 상대방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조광윤은 바로 이 병법을 교묘하게 적용해 와교관에서 싸우지 않고 수비장군 요내빈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와교관에서 조광윤이 싸우지 않고 거란군을 굴복시키자 어구관(淤口關)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백기를 내걸었다. 후주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세 개의 관문을 수복했다. 4월 29일, 거란의 막주자사 유초신(劉楚信)도 성과 함께 항복했다. 5월 1일, 계주 출신의 영주자사 고언주(高彦儔)가 성을 헌납하고 후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와교관 이남의 땅이 모두 후주의 소유가 되었다.
5월 2일, 세종은 행궁에서 연회를 베풀고 여러 장군들과 유주를 탈취할 계책에 대해 상의했다. 여러 장군이 의견을 말했다.
「폐하께서 경성을 떠나 42일 동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 남방 3개 관문과 2개 주를 수복했습니다. 이는 보기 드문 성과입니다. 지금 거란 기마병이 모두 유주 북쪽에 집결해 있으니 더 쳐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세종은 불쾌했다. 당일 세종은 또 출병시켜 고안주(固安州)를 점령했다. 세종은 친히 휘하 병사들에게 물가에 다리를 세우도록 지휘했다. 그는 저녁 무렵 와교관에 돌아와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날부터 세종의 건강이 안 좋아 진군을 정지시키고 변경(汴京)으로 돌아갔다.
조광윤이 수로군 주장으로 이번 거란정벌에서 수상군량수송을 감독하여 호호탕탕한 기세의 행렬을 지어온 것은 실은 후주군의 위세를 보여 주자는 전략이었다. 조광윤은 싸우지 않고 적장을 굴복시키고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군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우수한 전략가의 재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