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13>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7)

6. 낙타부대(駱駝部隊)로 ‘십팔리탄(十八里灘)’을 도강(渡江)

후주는 남당의 수주를 탈취한 후 비로소 회남에서 제대로 발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회남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남당에 속해 있었다.

세종의 야심은 남당의 강북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년동안 정비를 거친 그는 회남으로 3차 출정을 떠났다. 이번 회남출정에는 조광윤이 주장(主將)을 맡았다. 그로서는 큰 전쟁에서 처음으로 주장을 맡는 기회였다.
 
그는 이미 뛰어난 전략전술로 세종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그 동안의 화려한 승전보가 말해주듯이 세종은 이번 회남출정에서 승리의 확신을 가졌다. 957년(세종4) 10월 19일, 세종은 변경(汴京)에서 출발해 11월 4일 진회군(鎭淮軍)에 당도했다. 당일 밤 오경(五更)에 회하를 건너 호주(濠州)에 도착했다. 이때 남당의 호주단련사 곽정위(郭廷謂)는 후주의 공격을 방비하기 위해 호주성 사면에 튼튼한 방어망을 구축해 놓았다.

 

호주성 동남쪽의 회하에는 십팔리탄(十八里灘)이라는 얕은 여울이 있었다. 곽정위는 여울 주위의 수중에 말뚝을 박고 진영을 구축해 놓고 대소 함대 200척을 정박시켜 동쪽으로 진입하는 후주군의 수로를 막으려 했다.

당시는 회하의 수위가 낮은 시기였다. 조광윤은 북방에서 수송해온 낙타를 타고 물을 건너도록 명했다. 낙타가 물을 건너는 것을 보고 기마병을 통솔해 강을 건넌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십팔리탄의 수중진영을 격파했다. 그 다음 기마병을 이끌고 호주성 주위의 군영들을 격파하여 호주성은 고립되고 공포에 떨게 되었다.

성이 곧 무너지게 된 것을 본 곽정위는 항복했다. 호주(濠州)를 평정한 후 후주군은 수륙 병진하여 사주(泗州)로 향했다.

 

 7.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으로 사주성(泗州城) 함락

 

957년 10월 23일, 조광윤의 군사가 사주성 밑에 도착했다. 남당 사주단련사 범재우(范再遇)는 견고한 천연요새에 의지해 성을 사수(死守)했다. 사주성 남문은 회수(淮水)에 임해 있고 수중에는 남당수군의 함대 100여척이 있었다.

조광윤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을 써서 일부 병력은 사주성 북문을 맹공케 하고, 자신은 한 부대를 이끌고 남문으로 돌아갔다. 이미 남당 수군을 격파한 그는 노획한 함대를 타고 사주성 남문으로 진격해 불을 질렀다.

이에 남당의 범재우가 사주성과 함께 항복했다. 세종이 명을 내려 여전히 범재우를 그대로 단련사에 유임케 하여 사주를 수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입성한 후주군이 백성을 유린하거나 전답을 짓밟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사주 백성들이 감격하여 분분히 군량을 헌납하니 민심은 후주에 쏠리게 되었다. 후주군은 항복한 범재우로부터 보의(保義)절도사 진승소가 남당수군을 통솔하고 있고, 청구(淸口)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