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터에서 조광윤을 구했던 장경(張瓊)의 최후
옛날부터 많은 무장들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교만하고 제멋대로 날뛰면서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장경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961년(태조2), 조광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대해 보답하기 위해 장경을 전전도우후로 임명했다. 그는 용감무쌍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성격이 거칠어서 병졸이 조금만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해도 중죄를 물어 처벌했다.
금군 군교인 사규(史珪)와 석한경(石漢卿)은 송태조의 명을 받고 장병들의 동태를 살피고 그들의 언행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장경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이들을 군심을 어지럽히는 요괴라고 질책했다. 그는 사사로이 군대를 키우고 위세를 부려 금군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또 자신이 예전에 전쟁터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고 하여 사적인 일로 관부의 말을 유용하고, 역적 이균의 노비를 데려다 썼기 때문에 유죄하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죄질로 봐서는 사형에 처해야 했지만 조광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는 것을 감안하여 억울하다고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친히 그를 취조했다. 그런데 장경은 한사코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조광윤이 친히 그를 취조한 것은 분명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었으나, 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죽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송태조가 자신을 감싸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다. 그래서 조광윤은 그를 어사대에 넘겨 계속 조사받도록 했다.
성미가 거칠고 다혈질인 장경은 황제가 자신을 비호해주지 않자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장경의 죽음에 대해 조광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를 고발한 사규와 석한경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
▶ 처남 왕계훈(王繼勛)을 사형에 처하다
송태조 조광윤은 나라와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확고하게 법을 집행했다.
965년(태조6) 11월, 조광윤의 손아래 처남 왕계훈이 지휘하는 금군 웅무군(雄武軍)에 온 경성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병사들이 “출정하는 장병에게 위안부로 준다.”는 구실로 수백 명의 민가 자녀들을 납치하여 겁탈한 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윤은 크게 분노하여 범행을 저지른 자들을 전부 체포하도록 했다. 사건에 관여한 1백여 명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소황문(小黃門) 윤승한(閏承翰)마저 사건을 목격하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장형(杖刑) 수십 대를 맞았다. 직속상관인 왕계훈에 대하여는 왕황후(王皇后)의 동생이기도 했지만, 군율을 위반한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6월, 황제의 처남이라는 이유에서 지나치게 방종하고 많은 위법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군부로부터 고발당했다. 사실을 확인한 후 조광윤은 즉시 그를 군직에서 해임시켰다.
죽음을 면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는데 왕계훈은 또 다시 커다란 사고를 치고 말았다. 면직처분을 받은 후 울적해 있던 그는 점점 심리상태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분통을 집에서 일하는 노비들에게 돌려서 그들의 몸에서 살점을 도려내 칼로 난도질하는 것으로 울분을 삭이곤 했다.
그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 피해를 입었지만 이 사실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큰비가 내려 왕계훈 집의 담벼락이 무너지자 피해를 입은 노비들이 탈출하여 그 길로 관부를 찾아가서 그를 고발했다. 조광윤은 비로소 왕계훈이 이와 같이 극악한 짓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되어 그의 모든 관직을 파면하고 자택연금의 처벌을 내렸으며, 후에 다시 죄를 물어 등주(登州)로 유배를 보냈다가 결국엔 사형에 처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정의로운 일을 장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동시에 가차 없이 법을 집행하여 강직함과 유연성을 잘 조화시켰으니, 이로부터 송나라 초기에 사회풍조가 밝고 명랑했던 까닭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