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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32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국내 최고(最古)의 사면불 발견 40주년 특집
잃어버린 백제의 미소는 언제 볼 수 있을까?

 

(시사1 = 김재필  기자) “저의 마을 뒷산 선영 산소 옆 개곱돌 바위에 연화문 같은 무늬가 있는데유.

아무래도 문화재 같아서 말씀 드리러 왔어유”

1983년 3월14일 당시 궁평리에 사는(현재는 화전 2리) 권영섭(權寧燮) 당시48세)씨가 할아버지 산소 옆 바위가 심상치 않아 봉산면 사무소에 신고하여 그 때까지 온돌 구들장용으로 씌여져 없어질 뻔했던 바위는 ‘백제의 유일한 석조사면불상이자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조사면불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필자는 3년전부터 전화로 간곡히 부탁드려 사면불 앞에서 권영섭(올해 88세)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 할 기회를 가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신 그 분은 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해 보였고 발견 당시의 일을 상세히 설명 해 주셨는데 여기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 해본다.

 

『이곳은 우리 가문이 5대째 살고있는 마을로써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미륵당으로 불렀다.

또한 주위엔 오래전부터 서낭당도 있어 이 주위가 주민들의 신앙적 환경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산소 바로 옆(용미와 1m거리)에 개곱돌(蠟石)로 보이는 큰 바위가 50~60센티정도 땅속에 묻힌 채 있었는데, 가끔 몇몇 사람들이 삽과 호미등으로 묻힌 부분을 파내면서 그 바위를 쪼아 가곤 했는데 아마 구들장으로 쓰기 위한 것 같았다.

 

지금은 주위가 소나무등의 숲이 둘러 싸여 있으나 당시엔 민둥산으로 비가 많이 오면 산사태가 나곤 했는데 아마도 그런 때 사면불이 쓰러지면서 흙에 묻힌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마다 나는 깨진 부분이 흉하여 흙으로 덮어 주곤 했는데 그 이후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바위를 쪼아 가길래 이 바위를 왜 자꾸 캐가는지 의문이 들어 이질(姨姪)을 불러 같이 보다가 연화문 같은 무늬를 발견하고 보통바위가 아니라 혹시 문화재라도 되는 석물(石物)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고 하게 되었다. 문화재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곳이 미륵당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한편 주위에 돌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산소 갈 때마다 주워다가 산에 버리곤 한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당시 사면불을 조각할 때 생긴 돌 파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비가 많이 내리고 난 후엔 산소 앞 작은 평지에선 재의 흔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사면불 앞에 있는 기단이 보여 아마 절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이 말에 대한 신빙성은 발굴 당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지와 탑자리 등이 함께 있었다는 발굴 보고서에 씌여 있다)』

 

봉산면사무소의 보고를 받은 예산군청 공보실은 1983年 3月 21日 국립공주박물관에 문화재 감정 의뢰 공문을 발송하고 이에 즉각 공주와 부여박물관에서 현장조사를 의뢰하여 공주와 부여박물관은 박영복(국립공주박물관장)과 조유전(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을 조사단으로 현장 조사를 실시 한다.

 

3월 29일에는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와 예산군청에서 만나 현장에서 정밀조사를 한 결과 수법(手法), 법의(法衣),두광(頭光),신광(身光)등을 면밀히 검토한 후 사면불(四面佛)일 가능성과 백제시대 작품으로 판단되어 상경(上京)하여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조사내용을 보고한 후 4월 1일 각 언론기관에 발표하여 학계에 소개 되었다.

 

조사경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석조사면불상일 가능성과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판단된다는 사실이 4月 1日에 지상에 크게 보도 되었고, 아울러 묻혀 있는 일면의 불상규모를 분명히 밝히고 이 사면석불 주변에 당시의 유구 잔존유무를 확인하기 해서는 수습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대두 되어 4月 9日 황수영, 진홍섭등 문화재위원들이 현장을 답사한 결과 이 불상이 백제시대의 사면석불임을 재차 확인하고 수습조사의 필요성을 문화재관리국당국에 건의하게 됨으로써 문화재연구소에서는 황수영(문화재위원)등 5명의 지도위원과 이호관(문화재연구소예능민속실장)등 4명의 조사위원, 조사단장 조유전(문화재연구소학예연구관)등 6명의 조사단으로 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1983年 7月 20日 부터 8月 19日까지 마을의 새마을 지도자의 도움으로 인부들을 동원하여 긴급히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예산지역에 최초로 조성된 백제시대의 사면불(四面佛)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1984년에 보호각을 지어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는 한편 그 해 11월에 보물로 지정하였다.

 

발견자 권영섭씨와 함께 찾아 본 석조사면불은 불두(佛頭)와 양손이 결실된 채로 보호각 속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는 사람이나 불상 또는 예수상등을 만날 때 얼굴을 먼저 보고 첫 인상에서 나름의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어쩌랴 맨 먼저 본 바위 남면에 조각 되어 있는 얼굴 없는 주존불은 염화미소(서산에서 보았던 ’백제의 미소’)만 가슴으로 전해지고, 불신에 끼워 맞춘 두 손도 결실되어 짠한 마음이 든다.

 

권영섭씨 말대로 오랜 세월동안 민둥산으로 인해 폭우등으로 넘어져 매몰 되었는지, 어떠한 연유로 인위적인 힘을 가해 쓰러뜨려 매몰시켰는지는 모르지만 학술적 판단을 미루어 봤을 때 6세기초. 중반에 조성 되었다니 1,500여년동안 흙속에 묻혀 있던 4구의 불상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음에 세련미에서 백제시대의 서산 마애불에 버금가는 대작(문명대 著 ‘마애불’ 45p)이며 백제의 불교 문화중 석조사방불상의 조각사를 다시 쓰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애불은 화강암에 조각하였다.

헌데 이 사면불은 비교적 조각하기 쉬운 납석( 蠟石. 일명 곱돌이라고 함)에 조성되었다.

 

당시엔 석질이 강한 화강암에 조각하기엔 연장등이 발달 되지 않아 석질이 무른 납석에

조각하여 훼손이 더 많이 되지 않았나 추측 해 본다. 이후 연장이 발달되어 오래 보존할 수 있는 화강암으로 바뀐 마애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사면불의 명칭엔 마애(磨崖)라는 말이 없지만 다른 여타 마애불처럼 큰 바위는 아니더라도 조각 기법을 보니 ‘마애사면불‘ 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산재 된 5기의 사면불(예산 화전리 사면불, 문경 사불산 사면불, 경주 칠불암 사면불, 경주 불굴사지 사면불, 파주 진동리 사방불)도 마애불의 범주에 속한다.

 

동서남북 4면(4방향)으로 불상을 조각한 것을 사면불(四面佛) 또는 사방불(四方佛)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허나 이 곳 사면불에 대해 강우방(미술사학자,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이 유적을 사방불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사방불이 아니라 사면불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한다. 사방불이란 삼천대천세계의 축도(縮圖)로서 돌덩어리의 모양도 육면체로 다듬고 새긴 불상의 크기가 같아야 하며 좌상으로 표현된다.‘ (강우방 著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 158p)라고

했다.

 

이제 각면(各面)의 조각형태를 살펴 보자

1. 남면 여래좌상(南面 如來坐像)

보호각에서 맨 먼저 마주친 남쪽면에는 본존불(主尊佛)로 보이는 좌상(坐像)이 원각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로 전체 길이 200㎝, 전체너비 110㎝의 크기로 좌불상(坐佛像)과 거신광(擧身光)을 별조(別造)해서 붙인 것처럼 볼륨 있게 조각되어 사면불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보인다. 앉은 높이가 100㎝ 어깨의 너비는 53㎝의 크기인 결가부좌한 여래좌상(如來坐像)으로 법의(法衣)가 무릎 아래까지 흘러 내린 소위 상현좌(裳懸座)이다. 대좌(臺座)는 방형이나 불두와 양손은 결실되어 되었다. (발굴시 불두는 상호가 마모된 채 발견되어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신광(擧身光)은 전체적으로 보아 보주형(寶珠形)이며 두광(頭光)을 제외하고는 전면에 화염문(火焰文)으로 깊게 조각하여 선명하게 나타냈다. 두광은 돌기된 원내에 13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으로 표현하였다. 판간(瓣間)의 계선(界線)은 삼각소엽(三角小葉)이다. 그 외주(外周)에는 서광(瑞光)처럼 조각하고 다시 굵은 고사리 분양으로 둥글게 돌리고 있다. 이 중심부(中心部) 위에는 연화(蓮花)의 잎과 꽃을 나타내는 보주형(寶珠形) 조각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表現)되었다. 특히 광배 부분은 불꽃무늬로 대단히 화려하고 역동적이게 조각되어 있는데, 북위 말기에서 동위·서위 시대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에 버금 가는 수작이다.

 

나는 이 광배의 문양에 관심이 갔다. 광배(光背)는 대좌(臺座)와 함께 불신(佛身)을 장엄하는 불상의 필수 요소이다. 이는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는 규범인 32상 80종호 중 항상 몸에서 한 길의 광명이 솟는다는 장광상(丈光相)과 눈썹 사이의 백호(白毫)에서 빛을 발한다는 백호상(白毫相)을 근거로 조성하였다. 즉 광배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진리를 표현하는 장엄이므로 불신을 표현한 만큼 광배 조성에도 정성을 들여 표현한다.

 

지금 보고 있는 광배는 160cm나 되는 큰 주형 거신광(舟形 擧身光)으로 서해 바다의 잔잔한 물결이 밀려 오는 듯한 화염문(火炎文)이 장관이다. 위에는 서로 꼬이면서 주위를 장식한 당초문(唐草紋)이, 돌기 되어 있는 두광(頭光)에는 연꽃잎이 끝을 살짝 오므렸다가 피는 모습으로 보이는 13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이 원내(圓內)를 장식하는등 전면(全面)에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백제 연화문을 연구해온 일본의 국사관대학(國士館大學)의 도다 유지(戶田 有二)교수는 이 광배의 연화문에 세가지 특징을 꼽았다.

 

첫째 전체적으로 둥그스럼하고 새김이 깊다. 둘째 화판 선단(先端)의 반전이 예리한 것과 반전의 예리함이 약간 부족한 것이 있다. 셋째 간판은 중방과 연결되어 있다.

 

위의 특징으로 연화문은 백제 웅진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무령왕릉의 축조용 전의 연화문, 대통사지 석조 지주의 연화문과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절대연대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중국 남북조의 영향하에서 공주 도읍기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6세기 초반 내지는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 된다"고 발표해 광배를 통해 사면불의 조성시기까지 추정했다.

 

이 좌상은 나중에 기술하는 북면의 입불상(立佛像)과는 달리 이 좌불상은 불두와 두광 사이에 공간을 두고 조각하여 마애불상과는 다른 양식(樣式)을 보이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불두(佛頭 이하는 등에서부터 몸돌에 붙어있다. 수인은 결실(缺失) 되어 알 수 없으나 별조(別造)하여 끼웠던 결합 홈과 발굴시 출토 되었던 손의 파편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통인(通印)인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으로 판단 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내의는 Y字 모양이 보이며 복부위에 띠 매듭이 표현 되었다. 옷자락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오른쪽 복부를 감싸 돌고 있으며 한자락은 왼손목에 걸쳐져 무릎에 흘러내리고 있다.

 

2.북면 여래입상(北面 如來立像)

이 역시 불두와 양손이 결실되었으나 발굴시 주변 정리중에 유일하게 불두(공주박물관 소장)가 발견된 여래입상으로 팽이형의 육계는 소발(素髮)로 보안(寶顔)에 비해 아주 작은 편으로 상투와 같은 느낌을 준다. 양쪽 귀는 완전히 잘 남아 있다. 오른쪽 눈만 약간 알아 볼 수 있고 코와 입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위적인 파손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어 ’잃어버린 백제의 미소‘로 다가와 안쓰럽다. 출토위치로 보아 사면석불을 쓰러뜨리고 다시 불두를 인위적으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발견 위치가 쓰러져 남향한 입불상(立佛像)의 머리 위치에서 남(南)쪽으로 50㎝ 정도 파괴시킨 지점에 육계(肉髻)가 위로 놓여 거의 수평선상에서 발견된 점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원래 불두 자리에 복원해 본 결과 이 입불상의 불두가 위치에 정확히 맞았다고 한다. 발굴조사서에 의하면 파손불두(破損佛頭)의 육계(肉髻)가 소발(素髮)이고 불두(佛頭)에 비해 작은 고식(古式)이다. 발굴수습(發掘收拾)된 파편불두(破片佛頭)에 보이는 보안(寶顔)의 일부중(一部中) 눈은 조금 뜨고 입은 약간 벌려 웃음을 머금고 있어 ’백제의 미소‘가 이 사면불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두높이는 37㎝ 보안의 너비는 19㎝이다. 전체 높이 290㎝, 전체 너비 105㎝, 어깨너비 50㎝크기 정도로 안으로 약간 휘어져 경사지게 면을 잘 다듬고 입불상(立佛像)을 조각하였다. 불상이 서 있는 부분의 전체 길이는 204㎝, 발 아래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표현 되었다.

 

그러므로 실제 불신(佛身)의 높이는 165㎝, 어깨너비 50㎝의 거의 등신대(等身大)의 모습으로 새기어져 있으며 이 돌의 중심부 상부에 2줄의 원형 윤곽내에 9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을 조각하고 서면의 여래입상과 같은 수법으로 두부(頭部)가 조각되었던 것이나 파손 되었다. 이 입불(立佛)의 법의(法依)는 통견(通肩)으로 양 어깨에서 흘러내리게 하고 주름은 깊게 표현하여 가슴 부위에 속내의를 Y字 모양으로 조각하여 띠 매듭을 완연하게 표현하었다. 전면에 U자형의 주름이 반복되었고 옷자락 좌우로 전개되면서 발목까지를 덮고 있다. 의문(衣文)의 조법(彫法)이 매우 깊고 날카로와 우수하다. 발목의 옷자락은 Ω字형으로 처리되었고 불족(佛足)은 불신 전체로 보아 좀 작은 듯 하며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발가락 하나하나 까지도 표현 하였다.

 

왼쪽 발앞에 2개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이 남았고 그 외 부분은 파손 되었으나 이것으로 보아 원래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좌는 불족 앞으로 원형을 그리면서 이 석조에 하나의 돌로 함께 만들었던 것이다. 수인은 상면(上面) 소불입상(小佛立像)과 같은 수법으로 양손을 별조(別造)하여 끼웠던 결합(結合)홈이 거의 수평으로 있으며 서산(瑞山)․태안마애불(泰安磨崖佛)에서 보이는 속내의 띠 매듭과 불꽃무늬등은 거의 동일(同一)한 수법(手法)이며, 인계(印契)는 결실(缺失)되었으나 수습된 것 가운데 무명지와 꼬부린 것이 있어 이 역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통인(通印)이라고 할 수 있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으로 판단된다. 홈의 직경은 4㎝이며 너비는 45㎝이다. 이러한 석불상에 별도로 손을 끼우게 하는 기법은 중국의 용문석굴이나 공현굴의 석불에서 북위이래 옛 전통에서 유래 했는데 백제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입불상 오른쪽은 두광(頭光)의 연화조각(蓮花彫刻) 판단(瓣端)끝에서 부터 오른쪽 어깨선 아래까지 깨져서 금이 가 있다.

 

3.동면 여래입상(東面 如來立像)

동면의 여래입상(如來立像)은 발견(發見) 당시 묻혀있어 그 형태를 전혀 알지 못했으나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불두는 역시 결실(缺失)되고 없다. 법의는 가슴 깊이 U자형으로 헤쳐져 양어깨에 대칭으로 드리운 통견(通肩)은 7주름의 의습(衣褶)을 아래로 향할수록 넓게 하고 최하단에는 비교적 두터운 띠를 표현하여 끝맺음을 하고 있으며, U자형으로 패인 가슴에는 비스듬히 내의(內衣)를 나타내고 있으며 아울러 두터운 띠 매듭을 표현(表現)하고 있다. 두 팔에는 손을 별도로 만들어 끼웠던 결합 구멍만 남아 있다.

 

손을 별도로 끼우게 하는 기법은 중국의 용문석굴이나 공현석굴의 석불상등은 북위 이래의 옛 전통에서 유래했는데 이를 받아들인 백제의 마애불에선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두광(頭光)은 머리 뒤에 해당되는 위치에 지름 22㎝의 자방(子房)을 도드라지게 표현했고, 그 외곽으로 굵은 원권(圓圈)을 새기고 지름 54㎝의 내원(內圓)에 10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을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목 뒤의 2엽은 탈락되어 없어졌고 좌대 역시 파손(破損)되어 없어졌다.이 여래입상(如來立像) 역시 불상(佛像) 뒷면은 남면 좌상(坐像)을 새길 때처럼 안으로 휘어지게 따내고 어깨 위와 머리 부분이 광배에 붙지 않게 조각하므로써 입상(立像)이 독립된 시각(視覺)을 갖도록 했으며 화염문은 조각하지 않았다. 목 가운데는 한변이 2.5㎝, 깊이 5㎝의 흠이 남아 있어 머리는 별도로 만들어 결합(結合)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입상의 높이는 165㎝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등신대(等身大)의 입불상(立佛像)으로써 각이 매우 깊고 두드러져 있고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어 조각이 상하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

 

4. 서면 여래입상(西面 如來立像)

서면의 입불상은 발견 당시 지상에 노출 되어 있어 마멸이 가장 심하고 가장 좁은 면에 조각되어 있어 당초에는 측면불(側面佛)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전체 길이 110㎝, 불상의 어깨폭은 30㎝로 다른 3면의 불상중 가장 작다. 이 불상은 입불(立佛)로서 이 또한 불두는 결실되고 두광은 마멸되었으나 비교적 양호(良好)한 상태로 남아 있어 돌기 된 줄의 원내에 9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이 조각되었다. 두광의 원형(圓形)윤곽은 지름 27㎝이며 연화문의 연판(蓮瓣)은 둥글고 넓은 편이고 판엽(瓣葉) 1개(個)의 길이는 8㎝로 판단(瓣端)이 약간 융기되어 있다.

 

자방(子房)이 있을 중심부에 불두가 조각되어 있어 원래 몸돌에 붙여서 마치 마애불상과 같은 형식이나 얼굴은 마멸되어 불상 형태를 알 수 없다. 두광이 있는 부분외주(部分外周)에도 안으로 약간 휘어지게 잘 다듬어서 불상이 조각된 전체 윤곽을 알수 있게 한다. 불상의 상반신에 조각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좌우 어깨에서 흘러내린 모양이 매우 깊게 표현되었으며 가슴부분에는 내의(內衣)가 보이며 배 부분에 속내의를 묶어맨 띠 매듭의 윤곽이 불록하게 되었고 허리 아랫부분에 2∼3줄의 U자형 의습 모양으로 표현하고 불족(佛足)과 좌대(座臺) 그리고 천의(天衣)의 하단이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다.

 

양손이 없어 수인은 알 수 없으나 손이 있던 부위에 직경 4㎝ 정도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은 따로 별조(別造)하여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손을 별조로 끼웠던 홈의 거리는 26㎝이며 이 홈들이 배부위(部位)에 거의 수평선상(水平線上)에 있어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한 입상(立像)으로 오랫동안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던 관계로 마멸이 가장 심하다.

 

4면의 모두 조각이 힘차고 강하게 표현된 것은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재료(材料)가 납석(蠟石)으로 조각이 매우 용이하여 마애불과 같은 수법으로 조성되어 화강암 마애불보다 앞선 단계로 보인다. 헌데 불두가 결실되어 있으니 잃어버린 백제의 미소는 언제 볼 수 있을까?

 

백제는 ’예산 화전리 사면불‘.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등 3구의 마애불만 조성하였는데 왜 이 모두를 바닷길이 연결된 충남의 내포지역에 조성하였을까?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한성을 침략(475년)하여 백제의 개로왕 및 왕족들을 살해 한다.

 

혼란중에 왕권을 물려 받은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천도(476년)하여 나라를 재 정비한 후 고토(故土) 회복을 위한 국력 강화에 힘쓰는 한편 해상 장악권을 탈환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태안반도를 통해 경제 외교 문화적으로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되는데, 내포지방의 고로(故路)는 중국에서 바다를 통해 태안반도를 거쳐 웅진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왕족들과 교역상등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이에 그들의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신앙적 기복 대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길목에 큰 불상인 마애불들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썼는데, 산이 험하지 않고 평야가 넓으며 바다가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여 느리고 여유로운 민도가 특징이다.

 

이러한 ’내포지방‘ 사람들의 인성이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수(隨)로 이어지는 중국 불교 조각의 전통을 수용하여 백제 고유의 양식을 결합 시켜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에서도 보기 힘든 단단한 바위에 감정의 물성이 깊게 느껴지는 “백제의 미소”를 창출하였던 것이리라.

 

이 대한 조성기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문대(미술사학자)는 이 사면석불에 대해 그의 저서(한국미술사 방법론 235p)에서 ‘이 사면불은 힘차면서도 우와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서 백제불의 특징을 점차 갖추어 가고 있는 것으로 백제불교의 정착과 확대, 국력의 신장을 보여주는 조형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고 기술했다.

 

예산이 고향인 최완수(간송미술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선생은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 이곳 예산에 세워진 배경에는 6세기경의 한반도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내포의 3불(서산·태안 마애삼존불, 예산 사면석불) 중 예산 사면석불의 주존불이 무령왕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

 

2004년 12월 2일 공주대에서 열린 첫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도 사면석불이 6세기 초(538~660년) 제작되어 태안과 서산의마애삼존불 등 백제시대 뿐만 아니라 국내의 어느 마애석불보다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결론지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그 제작연대는 명문(銘文)이라든지 뚜렷한 근거가 없어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백제시대인 6세기의 중엽에 해당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상의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말이 생각난다. 1,500여년 역사의 부침을 지켜 봐 오던 이 사면불도 어느 때부터 일상을 묻혀서 지내다가 한 사람(발견자)의 안목에 의해 정토로 다시 돌아온 것이리라.

 

“선생님의 발견과 신고가 없었으면 더 도괴 되어 영원히 불상의 형체가 없어진 흉물스런 바위로 남았을텐데 정말 큰일 해 내셨네요” 라는 말에 그분은 머쓱해 하시면서도 자랑스런 표정이 엿 보인다.

 

동행인이 “문화재로 판명된 후 혹시 포상금이라도 나오던가요?” 하는 질문엔 표정이 누구러졌다.

“ 포상금은 없었어요. 이동할 수 있는 문화재를 발견하면 포상금이 지급 된다는데 이동할 수 없는 문화재는 포상금이 주어지지 않는데요. 신고로 인해 처음엔 마을 사람들의 불평도 많았어요” “왜 그랬나요?“ ”사면불이 문화재로 판명 되자 반경 1킬로(지금은 500미터 축소) 내엔 건축 허가등이 안나서 주민들이 불편해 했던 거지요“라고 말하는 그 분의 표정이 밝지는 않다.

 

그 분 역시 무엇을 바라고 발견 신고를 한 것은 아닐터, 하지만 국내 최고(最古)의 석불을 발견한 사람에 대한 예우가 없었다는 것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이번 답사에 인터뷰에 응해주신 발견자 권영석님과, 동행하여 여러 편의를 제공해 주신 김훈(사진가)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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