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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과 규칙적 생활이 건강의 비결"

[인터뷰] 85세 임오십령 할머니의 삶

“소식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 건강의 비결이다.”

 

서울시 강북구 4.19로 13길에 거주하는 임오십령(林五十鈴, 85) 할머니가 기자를 만나 건넨 말이다. 오십령(五十鈴)은 딸랑거리는 50개의 방울을 의미하고, 부친 슬하에 오형제가 50개의 방울처럼 딸랑거리며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자신의 이름을 짓었다고.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스트레칭과 참선을, 오전 7시에 아침 소식을 한다. 이후 커피 한잔을 하고, 우이동 북한산 둘레길로 향하는 시간은 오전 8시경. 저녁 취침은 어김없이 저녁 10시이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한 탓인지 아주 건강하고 젊게 보였다.

 

경남 사천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자랐고 23살 때, 서울 출신 남편을 만나, 25살(1965년)에 결혼을 했다. 그동안 남편과 무탈하게 잘 살았다. 하지만 2년 전인 지난 2022년 4월 10일 건강했던 남편이 집에서 갑작스레 영면을 했다. 그 충격으로 뚜렷이 보였던 눈이 지금은 글씨 조차 잘 볼 수 없게 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남편은 한정식 사업을 했다. 생전 남편과 시장, 산, 여행 등 어디를 가도 항상 함께 했다. 지난 78년부터 20여 년 정도 서울 종로구 청진동 ‘서울호텔(지금은 없음)’주변에서 한정식 식당을 아주 크게 했다. 당시 주방장이 아주 거칠게 해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제가 한식과 일식 자격증을 땄고, 운전면허까지 땄다. 당시 여자가 운전을 하고 다니니, 남자들이 시비를 걸고 그러더라. 그래서 남자들이 건들면 급소를 찌르기 위해 태권도를 배운 기억이 난다. 남편이 산을 좋아해 전국에 가보지 않은 산이 없을 정도다. 남편이 생존했던 83세까지는 바늘구멍을 찾아 옷을 꿰맸고, 글도 잘 읽었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지금은 바늘구멍을 찾기가 힘들다.”

 

그는 남편과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특히 며느리가 너무 잘해 효녀라고 치켜세웠다. 임 할머니는 ‘현재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비우니 편안하다’라고 말했다.

 

“1965년, 부산에서 살 때 서울 출신 남편을 중매로 만나 ‘을지예식장’에서 결혼했다. 당시 서울은 을지예식장과 종로예식장, 예식장이 두 곳밖에 없었다. 시아버지는 고려대를 나와 한국전력에 근무했다. 6.25때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친구가 신고해 북한으로 끌려갔다. 경남 사천에서 거주했던 친정아버지는 일본에서 낳아 일본에서 명치대학교를 다녔다. 나락을 수확하는 홀태와 담배를 제작하는 기계를 만들어 공장을 했다. 경운기를 만든 대동공업이 요즘 유명한데, 그 사장이 우리 아버지한테서 배웠다. 친정어머니는 부산 최고의 경남여고를 나온 엘리트였다. 일제시대 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끌려가야 하니, 양가 부모들이 다 아는 사이여서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가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친정아버지는 일본에서 귀국해 부산에 거주하다, 90살을 넘겨 돌아가셨고, 부모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그는 외동딸이라서 곱게 자랐다고 했다.

 

하지만 시집을 간후, 엄청 고생을 했다. 또한 안 사람이라서 밖을 나오지 않아 세상 물정을 모르기도 했다.

 

“친정 할머니가 조금 엄했다. 시집을 가면 죽어서 시체로 나와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냥 나오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집을 와 많이 울었다. 27살에 큰아들을 낳았다. 20여년을 운영한 한정식 식당을 그만두고, 번 돈으로 남편과 함께 편안하게 살았다. 은퇴하고 부부 동반으로 외국 여행도 많이 했다. 당시 서울 성동구 왕십리 무학여고 주변에서 살았는데, 집 평수가 커서 치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강북에다 50평을 사 집을 지었고 87년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거의 30년이 다돼 간다.”

 

임 할머니는 40년생이다. 고인이 된 남편은 1937년생이니 세 살 터울이다. 64년에 시집와 서울에서 줄곧 살았다. 당시 시댁 식구가 열 한명이었다.

 

“남편의 맏형이 집을 나가 둘째인 남편이 부모를 뫼시고 살았다.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가 살아계셨고, 당시 시아버지는 북으로 끌려가 없었다. 시어머니와 네 명의 시동생, 한 명의 시누이를 포함해 11명의 식구가 같이 살았다. 남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옷도 사지 않았다. 주로 내가 옷을 사줬다. 그리고 맨 날 함께 다녔다. 그 때는 매일 같이 있으니 지겹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살아 있을 때가 행복했다.

 

남편은 여자가 밖에 돌아다닌 것을 질색을 했다. 그래서 싸우기 싫어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이 멍청해지고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남편은 친구가 오는 것도 싫어했고, 만나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남편이 싫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동창, 친구들은 다 떨어졌고, 남편이 죽고 이제 친구들을 만나려고 하니 죽고, 병들어 있고, 요양원에 가 있더라. 그러니까 지금은 이곳 동네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다.”

  

시집을 오니 시할머니는 굉장히 완고했고, 시어머니는 인품이 좋았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저보다 곱게 자랐다며 부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어른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아 일을 열심히 했다. 시어머니는 저를 딸처럼 좋아했다. 한번은 딸(시누이)이 나한테 대들다가 들켜, 시어머니한테 혼이 났다. 그래서 당시 시누이(현재 83)가 엄마한테 ‘누가 엄마 딸이냐’라고 대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어머니께 사랑을 많이 받아, 받은 만큼 지금의 며느리한테도 잘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시할머니한테는 시집살이를 많이 했다. 그때부터 '나는 며느리한테 절대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굳은 맹세를 했다.”

 

그는 막상 시집을 가니 남편 형제 중 막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가슴 아픈 사연도 들려줬다.

 

"남편과 살면서 형제들을 모두 공부를 시켰고, 장가를 보냈다. 하지만 막내가 자살이라는 극한 선택을 했다. 군대가기 전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군대에 있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군대 제대를 하고 오니 딸 하나를 낳고 이혼을 해 살고 있었다. 1981년도인데, 이혼한 그 여자와 제주도로 여행을 가 다투고, 집으로 와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우리 형수 잘 부탁한다’라고 말한 후, 집을 나가 하늘나라로 갔다. 정말 영리하고 명석한 시동생의 죽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는 제 때 밥 잘 먹고, 운동을 열심 하니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상쾌해졌다고 전했다.

 

“큰 병 없이 밥을 잘 먹고 있다. 아침은 첼리 주스를 곁들인 소식을 한다. 점심은 키위, 바나나, 감자, 계란 등을 먹는다. 저녁밥을 먹은 후, 와인 한잔을 마시면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 잠잘 때까지 절대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다. 뭘 해도 움직이는 연습을 한다. 집에서 장고도 치고, 무용도 하고, 인근 산에도 가고, 헬스도 한다. 서울 종로 조계사의 불자라서 70대 때 설악산 백담사에서 봉정암과 문장대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선녀바위, 울산바위, 칼바위 등도 다 가봤다. 정말 경치가 아름다웠다. 당시 다시는 못 오겠지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진짜 나이가 들어 가지 못한 신세가 됐다. 지금은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도 보폭을 짧게 한다. 넘어져 고관절이라도 다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임 할머니는 ‘학생이 교장 선생의 뺨을 때렸다’는 최근 언론보도를 접했다며 ‘요즘 학생들이 너무 거칠어 큰일’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과거 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통념이 있었다고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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