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19)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 송태조, 남당의 도성 금릉성을 무혈 함락하기로 결정

 

남당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할 때, 군대의 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송태조 조광윤은 특별히 보검 한 자루를 조빈에게 수여하며 말했다.
「부장(副將) 이하 장군의 명을 어기는 자는 모두 참수하도록 하시오.」

이로써 조빈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마음대로 살육하는 등 전쟁 폭행을 저지른 장병들에 대해 참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보검 때문에 부장인 반미와 부하 장병들은 겁을 먹고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조빈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곧바로 장강으로 진군해 남당 경내에 진입하자 소식을 들은 수비군들은 도주하고 말았다. 송군은 순조롭게 도강하고 도성 금릉을 겹겹이 포위했다.

금릉은 일체의 외부지원이 끊기고 남당왕 이욱은 고립된 성안에 갇히게 되었지만 성을 의지해 완강히 저항하며 투항하지 않았다.

이때 송태조 조광윤은 북한을 정벌할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과 병사들에게 사상자를 내지 않으려고 금릉성을 포위할 뿐 공격은 절대로 하지 말도록 조빈에게 신신 당부했다.

조광윤과 마찬가지로 선한 심성을 가진 조빈은 그의 지시를 깊이 터득하고 계속 인내하면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당이 투항할 때까지 근 1년 동안 금릉성을 포위만 하고 있었다.
 
송군에게 포위된 금릉성은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송나라 장병이 고성을 지르며 공격하는 시늉만 해도 금릉 성문이 열리고 송군이 입성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조빈은 조광윤의 부탁을 깊이 새기며 성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단호히 조처했다.

변경(汴京)에 있는 조광윤도 오로지 평화적으로 남당을 평정하려 하기 때문에 송군이 너무 급히 성을 공격할까봐 근심되어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조빈에게 조서를 전달했다.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마시오. 만일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이욱 일가는 잘 보호하기 바라오.」
장기간 금릉성을 포위하고 있느라 피로가 갈수록 쌓이게 되자, 장군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을 공격하는 방안을 제의했었다.

조빈은 “시간을 오래 끌면 군대가 피로해지고 그 사기가 떨어져 성을 공격하기가 힘들어지며, 군대가 장기간 외부에서 작전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게 된다.”는 병법의 이치를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장군들과 상의해 성을 공격일을 정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조빈은 공격날짜를 확정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 안으로 사람을 보내 이욱에게 날짜를 알려주고 투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이욱이 계속 투항하지 않자 공격 날을 며칠 앞두고 조빈은 최후로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왕께서 먼 행차하실 필요 없이 군영에만 오시면 극진히 모시고 공격을 취소하겠습니다.」

이욱이 여전히 투항하지 않자 송군은 정한 날짜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격 날이 닥쳐왔을 때 조빈은 갑자기 병이 생겨 군무를 보지 않기로 했다. 곧 성을 공격할 중대한 군사작전의 시각이 닥쳐왔는데 주장이 병이 생겨 군무에 관여하지 않는다니 여러 장군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에 통솔자가 없는데 어떻게 군사작전을 개시할 수 있겠는가? 장군들은 병문안을 하러 모두 조빈의 막사로 모여 들었다.

장군들이 모두 모인 것을 보자 조빈이 입을 열었다.
「내 병은 약으로 치유되는 병이 아니오. 여러 장군과 병사들이 진심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 내 병은 곧 나을 것이오.」

여러 장군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함께 향을 피워 맹세를 하니, 그의 병은 과연 다 나았다고 했다.

975년(태조16) 11월 27일 마침내 조빈이 송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리자 1년간 끈질기게 버티던 금릉성은 썩은 나무 꺾이듯이 무너지고 말았다.

남당왕 이욱은 투항서를 올렸고 강남의 19개 주, 3군, 108개 현, 65만 5천여 세대가 송나라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조광윤은 황제가 된 후 다섯 번째 통일전쟁에서 지금까지 평정한 나라 중에서 가장 큰 나라인 남당을 평정하게 되었다.

이 전쟁이 송태조 조광윤의 마지막 통일전쟁이 되었다. 조광윤이 바로 이듬해에 ‘촉영부성(燭影斧聲)’의 미스터리를 남기면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성이 무너진 후 이욱이 나와서 항복을 하자 조빈은 그에게 예의를 갖춰주었다.

조빈은 군대를 정비해서 궁으로 들어갔는데, 천 명의 정예부대를 선발해 궁문을 지키도록 하고 누구도 입궁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조빈은 망국의 군주를 보니 불쌍하다는 마음이 생겨 이욱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이제 변경으로 가야하니 조정에 귀속되면 봉록이 제한될 것입니다. 비용이 많아지면 국가에서 부담하기 어려워지지요. 궁에 들어가셔서 재물을 많이 챙겨 변경(汴京)에 가지고 가서 요긴하게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일단 아군이 몰수해 장부에 기록되면 더 이상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망국의 군주 이욱은 본래 감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배려의 말을 듣자 갑자기 눈물을 비 오듯이 쏟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재물을 조금도 탐내지 않았다.

금릉성 안에 있는 곡물창고와 국고에 관해서 조빈은 전부 전운사(轉運使) 허중선(許仲宣)에게 맡겨 처리토록 하고, 본인은 일체 묻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았다.

경성(京城)에 돌아가는 날 조빈의 배에는 여전히 일부 도서와 옷가지, 일용품들이 있을 뿐이었다.
 
조빈은 조광윤의 당부를 철저히 지켜 장병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엄히 단속함으로써 전쟁이 1년간 지속되었어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송군의 주장 조빈은 “조광윤의 생생한 화신(化身)인 것”이다.

한 국가의 군신이 이같이 다 도심(道心)을 갖고 있다면 천하가 평화롭고 통일되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이 수습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