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16)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 잘못된 삶으로 수치스런 나날을 보내는 남당왕 이욱

 

970년(태조11) 초, 남한을 멸망시킨 송나라는 군대를 한양(漢陽)에 주둔시키고 수천척의 함대를 건조해 과거에 평정한 형남에 정박시켰는데, 이는 자연히 남당을 위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남당의 한 상인이 송나라 수군이 형남에 정박하고 있는 사실을 이욱에게 알려주고 비밀리에 관병을 한양에 파견해 송나라의 이 방대한 전투함대를 태워버리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욱은 감히 송나라에 도전장을 내지 못했다. 송나라의 군사적 압력 앞에서 이욱은 일찍이 국호를 없애고 ‘남당(南唐)’을 ‘강남(江南)’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970년(태조11) 1월 이욱은 또 의제(儀制)를 낮추고 ‘조서(詔書)’를 ‘가르침(敎)’으로 바꾸고, 이후부터 궁전을 더 이상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았다. 더욱 철저히 몸을 낮추기 위해 이욱은 자제들의 봉직을 낮추고 ‘왕(王)’의 명칭을 ‘공(公)’으로 개칭했다.
 
또 송조정(宋朝廷)에 금전 30만 냥, 식량 20만 석을 헌납함으로써 일편단심 오로지 한 황제를 섬긴다는 뜻을 표명했다.
 
남당왕이 스스로 명호(名號)를 낮추는 것은 사실은 자국의 정치, 경제적 자주권을 보호하고 여전히 할거정권의 행세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송태조 조광윤도 내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벌고 여타 할거정권에 대한 수습을 가속화하기 위해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남당에 대해 관대한 태도로 일관했다.

 

반간계(反間計)의 수법으로 송나라에 반기를 든 임인조를 제거한 후 그는 드디어 남당에 대한 군사조치에 착수했다.

전쟁을 개시하려면 우선 남당의 지리와 환경을 알아야 했다. 971년(태조12) 조광윤은 한림학사 노다손(盧多遜)을 사절로 파견해 남당에 가서 이욱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고 암암리에 남당의 지형을 알아보도록 했다.

돌아오는 길에 배를 선화구(宣化口)에 정박시킨 노다손은 사람을 시켜 이욱에게 말을 전했다.
「조정에서 천하의 지도를 다시 제작하고 있는데, 역사자료관에 유독 남당 여러 주의 지도가 빠져 있습니다.

각 주의 지도책 한 권씩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이욱은 이를 송조에 잘 보이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중서사(中書舍)의 서개(徐鍇)를 시켜 밤새도록 각 주의 지도책을 교정하게 한 다음 노다손에게 보내 주었다.
 
이리하여 남당 19개 주의 지리형세, 국경의 수비상황, 인구 분포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특수지도를 얻은 것은 남당의 강산을 획득하기 위한 비밀연락도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통일대업을 이루기 위한 일환으로서 남당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개시하기 위한 구실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 적의 항복을 이끌어 내려면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후주의 무장시절이나 송태조가 된 이후에나 조광윤은 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시기의 관례대로 조광윤은 여전히 피를 묻히지 않고 남당을 통일하려했다.

노다손이 남당의 지도를 갖고 조정에 돌아온 후, 조광윤은 또 합문사(闔門使) 양형(梁逈)을 남당에 사절로 보내 송조정(宋朝廷)에서 제사(祭祀)를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남당왕이 조배(朝拜)하러 올 것을 요청했다.

물론 목적은 이욱을 변경(汴京)에 억류시켜 그의 항복을 이끌어냄으로써 평화적 방식으로 남당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당에 간 양형은 외교수완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욱을 만난 그는 뻣뻣한 태도로 말했다.
「대송(大宋) 황제께서 올 겨울에 제사를 거행하려하시니 참석하기 바랍니다!」

이욱은 바보가 아닌 이상 송나라에 가면 동생 이종선처럼 인질로 억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조공하러 가지 않는다면 송나라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 남당에 대해 대대적 군사공격을 실시할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욱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이욱이 조배하러 오지 않자 조광윤은 또다시 지제고(知制誥) 이목(李穆)을 파견해 조배하러 오라는 조서를 전달했다.

남당에 온 이목도 역시 거만한 태도로 이욱을 대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조서에 이렇게 썼다.

「짐(朕)이 겨울에 조상의 제사를 올리려 하니 그때 경(卿)과 함께 제례를 올리고 싶소.」

이것이 독촉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욱은 병을 핑계로 사절했다. 그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말했다.

「신(臣)이 대송국을 공손히 섬기는 것은 오로지 조상이 남긴 사직을 보존하려는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면서 강요할 줄은 몰랐소. 오늘 신세가 이렇게 된 바에는 죽는 편이 낫겠소이다.」

이목이 쌀쌀하게 말했다.
「“조배하러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는 것은 군주께서 결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남당에 정예군대가 있고 재력이 풍부하다 해도 전쟁이 나면 아마도 칼날 한번 제대로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사숙고 하시고 후회가 없도록 하십시오.」

그 후 송나라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남하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욱이 급히 사자를 파견해 명에 따르겠다는 상소를 보냈으나 조광윤에게 거절당했다.

이욱이 애써 남의 비위 맞추면서 살아가는 굴욕적인 생활방식에 대해 일부 대신들은 반대했다.
 
내사사(內史舍)의 반우(潘佑)는 분노를 참다못해 상소를 올리고 현 정국을 비판하면서 이욱이 망국의 군주가 되서는 안된다고 질책했다.
 
전후로 일곱 번 상소를 올렸으나 이욱은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지 못했다. 반우는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