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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34-과천 홍촌마애승상

관악산 등산로 초입의 바위에 조각된 마애승상

(시사1=김재필 기자) 마애불을 답사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마애상(磨崖像)은 대부분이 부처나 보살을 주 대상으로 조성되었다. 헌데 스님 5분의 얼굴을 조각한 ‘마애승용군’이 있다 하여 카메라를 메고 찾아 나섰다.

 

4호선 전철을 이용하여 정부청사역 6번 출구를 나선다. 앞쪽 수자원공사 방향으로는 기술표준원, 국사편찬위원회, 공무원교육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국가기술표준원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 ‘홍천마애승상’이라고 쓴 이정표가 보인다.

 

국가표준기술원 펜스를 오른편에 끼고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등산로로 들어서니 300여m 거리에 등산로를 가운데로 양옆으로 두 개의 바위가 놓여 있는데, 북동향을 향한 높이 1.7m, 폭 2m.두께 1.1m 정도 되는 왼쪽 바위에 입체감 있게 조각된 5구의 스님 얼굴이 바위 위쪽에 3구, 아래쪽에 2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상과 측면상으로 구분된다. 가느다란 눈, 오똑한 코, 반쯤 벌려 웃고 있는 ‘홍촌마애승용군(전엔 용암마애승용군이라 칭했는데 2021년 5월25일에 현 명칭으로 바뀜)’이 등산객들을 맞이 해 준다.

 

1975년 동국대 조사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 마애상은 바위 상단에 정면으로 2명 측면으로 1명, 하단에 정면과 측면으로 각각 1명씩인데 투박하고 서투른 솜씨지만 모두 익살스럽고 잔잔한 미소를 띤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각각 형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단 왼쪽의 얼굴은 길이 15세티, 폭 9센티 정도의 크기로 큰 코에 눈과 입에서 미소를 띄우고 있으며 머리는 삭발하지 않고 턱은 수염을 표현한 듯 두툼하고 45정도의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② 중앙 얼굴은 길이 17, 폭 13㎝로 큰 코에 눈과 입의 표현이 상당히 흐뭇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위엔 높은 두건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마부분으로 봐서 삭발한 것으로도 보인다.

③ 상단 오른쪽은 얼굴은 길이 10, 폭 9㎝ 크기로 큰 코에 역시 눈과 입은 미소로 머금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④ 하단의 왼쪽 얼굴은 길이 14cm, 폭 12cm의 크기로 큰 코에 눈과 입에는 여성같은 살짝 미소를 띄고 있으며, 머리엔 베일을 두른 듯하며 약간은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가슴 근처에 작은 얼굴이 보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⑤ 하단의 오른쪽 얼굴은 길이 10cm,폭 8cm의 크기로 이 역시 큰 코에 눈과 얼굴에 미소를 띄고 왼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특이한 것은 두 손을 모은 것 같은 표현이다.

이 미애승용군은 과천의 보광사에 있는 석조보살입상과 계곡 위에 있는 관악산 일명사지에서 고려시대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화문대석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들과 비슷한 시기인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헌데 무슨 사유로 부처나 보살이 아닌 스님들의 얼굴만 한 곳에 새겼을까?

전에는 근처에 화재로 소실된 용운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옛 암자인 용운암(지금은 용암사 자리에 백운사라는 작은 사찰이 들어섰다)의 스님들이 행사를 마치고 어느 스님의 제안으로 5명이 한자리에 모여 인증샷 찍듯 얼굴을 바위에 새겼을까? 아니면 암자가 없어진 아쉬움에 추억을 남기기 위해 바위에 얼굴을 새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 본 나는 깜짝 놀랄만한 걸 발견하였다.

4명의 얼굴은 모두 코가 크고 머리가 덥수룩하여 서양인처럼 보이고 다른 1명은 여자 얼굴로 보였다.

상단의 3명은 동방박사로, 살짝 눈을 감고 있는 듯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여자는 잠들어 있는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처럼 보이고, 오른쪽에서 여자 쪽을 바라보며 지그시 웃고 있는 얼굴은 요셉으로 보였다

 

                            .

 

맨 아래에는 로마시대에 박해받았던 고대 기독교인들의 표징인 물고기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마애상은 스님들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탄생 성화’가 새겨진 처럼 보인다.

우리는 통상 한국의 기독교(基督敎.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통칭함)의 한 축인 천주교에서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1784년을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해로 삼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래되지 않은 고려초기에 조성된 이 마애상이 ‘기독교 성화’ 라고 추측한 것은 무리일까?

            

                                              돌십자가와 점토 성모상

 

나는 몇 년전에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성모마리아 점토상과 돌십자가를 보기 위해 숭실대학교 내에 있는 ‘한국기독교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1956년대 경주 불국사 정비시에 출토됐다는 '성모(聖母) 마리아상(瑪利亞像)'은 높이 7.2㎝의 점토상으로 중국에서 신라로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불교의 관세음보살상처럼 보이는 이 점토상은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몸 뒤에 표현한 장식) 같은 형상이 더욱 불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불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을 자세히 보면 화관(花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형상을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게 박물관의 해석이다.

같은 시기에 출토된 돌십자가는 24.5x24.0x9cm의 크기로 평면은 십자가형이고, 단면은 사다리꼴로 앞면보다 뒷면의 폭이 넓은 점이 특징이다.

이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숭실대)측은 불교국가 신라의 왕실 사찰에서 발견된 돌십자가에 대해 ‘통일신라에 당나라로부터 경교(景敎)가 한국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경교의 전래는 이렇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그리스도의 이인격설(二人格說)을 주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마리아 신모설(神母說)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 단죄 되어 이집트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을 신봉하던 사람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개척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페르시아의 토착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이슬람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네스토리우스교인들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들은 서기 635년(신라 선덕여왕 2년)에 당나라 장안(長安)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 했는데 638년 7월 당태종의 칙령에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네스토리우스교 예배당인 대진사(大秦寺)가 건립된다.

 

네스토리우스교는 현종대에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의 경교(景敎)로 불리게 된다. 당시 당나라 태종(太宗)은 각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모두 포용하는 정책을 실시 하였기에, 네스토리우스교도 경교로서 수용되어 폭넓게 전파되었으며, 서기 781년(신라 선덕왕 2년)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현재 중국 비림박물관에 있음)가 세워졌으며 비문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씌여 있다.

 

높이 9척, 너비 3척 반, 두께 1척 가량 되는 보통 크기의 이 비석은 상부와 비신(碑身), 좌대(座臺)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장(意匠)에는 불교나 도교적인 요소가 뚜렷하다. 상부는 반룡(蟠龍)이 큰 여의주(如意珠)를 받쳐들고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십자가가 연꽃과 부운(浮雲) 속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3자 3행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란 표제문(標題文)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지은이인 경정은 페르시아 사람으로 장안 서명사(西明寺)의 승려 반야삼장(般若三藏)과 친교가 있었고(반야삼장은 북인도인) 소그드어판 《이취경》(理趣經)을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일본의 승려 구카이(空海)가 당에 들어갔을 때도 서명사에서 반야삼장에서 배운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신 정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총 1,800여 자의 ‘송병서(頌幷序)’가 있고, 전면 하단과 좌 · 우면에는 시리아어로 경교사들의 명함과 직분이 밝혀져 있다. 비문의 골간인 ‘송병서’에는 주로 경교의 신앙적 교리와 신조 및 의례 등이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경교 전파에 관한 왕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기술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경교의 번성은 200여년에 그친다.

 

‘회창법란’(845)과 ‘황소의 난’(878) 등 일련의 배타적 소요에 휘말려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경교가 통일신라에도 들어왔을 것으로 교계와 일부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당나라에서 경교가 활발하게 퍼져나갈 때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초기였는데 통일신라는 친당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제도를 수입했으며 신라인들이 당에 유학하는 경우도 빈번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비문의 지은이인 경정은 페르시아 사람으로 장안 서명사(西明寺)의 승려 반야삼장(般若三藏)과 친교가 있었고(반야삼장은 북인도인) 소그드어판 《이취경》(理趣經)을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일본의 승려 구카이(空海)가 당에 들어갔을 때도 서명사에서 반야삼장에서 배운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창조주이기도 한 야훼는 비문에서 아라파(阿羅訶, 시리아어 음사)로 표기되어 있다.‘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비신 정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총 1,800여 자의 ‘송병서(頌幷序)’가 있고, 전면 하단과 좌 · 우면에는 시리아어로 경교사들의 명함과 직분이 밝혀져 있다. 비문의 골간인 ‘송병서’에는 주로 경교의 신앙적 교리와 신조 및 의례 등이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경교 전파에 관한 왕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기술로 채워져 있다.

 

한편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일찍이 한국에 4년간 머무르면서 전국의 사찰을 역방한 후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체류했는데 이때(1917) 그는 사내에 이 비의 모조비를 건립하였다. 그는 후일 일본 고우야(高野)산에도 똑같은 모조비를 세웠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을 기념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경교의 한국이나 일본 전파를 상징하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당대에 경교가 성행하던 시기(태종∼덕종, 약 150년간)에 많은 신라인들도 자연스럽게 경교와 접촉하였을 것이고, 기록이 없어 확언할 수 없지만, 이들에 의해 신라에 기독교가 알려지거나 초전됐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멀리 동로마제국(비잔틴)을 비롯한 서역 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서역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자체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도 가일층 함양될 수 있었다. 그러한 문물 가운데는 불교를 비롯한 종교문화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가 침투하던 시대상황이나 주위환경, 그리고 기독교를 선호하는 당나라나 서역과 여러 가지 교류를 진행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경교가 신라인들에게 알려지고 암암리에 전래 되었을 개연성은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시대에도 경교가 있었다는 의문은 최치원의 사람 사랑과 나라 사랑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일념(一念) 하나로 30년 동안 유적지를 답사하고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소설화한 최치원의 후손인 최진호가 쓴 장편 ‘소설 최치원(3권 ’꿈꾸는 별‘)’에 신라왕과 경교 수녀인 배아숙의 대화에 아래와 같은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왕 : 지금까지 우리 궁에는 수많은 고관대작과 외국인 드나들었지만 난 그날 수녀님에게 매우 색다른 느낌을 받았소, 수녀님 존함이 어떻게 되오?

대왕은 밀러엄 수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녀 : 저는 세례명이 밀이엄이고 세속의 이름은 배아숙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지어주진 이름이지요.”(144P)』

 

삼국유사의 기록중에 신라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1) 때의 고승 혜통(慧通)에 대한 찬문(讚文)에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 것으로, 당시 새롭게 접한 이교(異敎)인 기독교일 가능성이 있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密敎)의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에게 사사한 후 그의 천거로 당 고종(高宗·재위 650∼683)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 준 바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고대 동방기독교(즉 경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을 이어 당에서 기독교를 부흥시킨 주인공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景敎寺)를 건립하도록 하여 ‘수많은 성읍에 경교사원을 건립 하였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을 맺은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公傳)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경교를 ‘외도’로 인지하고 멀리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 경교가 가까이에, 즉 신라 땅에 들어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928년 6월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요대(遼代) 성종(聖宗·983∼1031)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敬拜圖)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에 의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때는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이 지역에는 그 이전에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이곳 ‘홍촌 마애승상‘의 조성시기를 학계에선 고려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는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산속에 은거 생활을 하면서 기독신앙 생활을 하는 경교인들이 한국의 마애불을 보고 바위에 기독교적인 조각을 새기지 않았을까 하는 내 상상은 무리일까?

답사를 마치고 시내에 들어서니 한 백화점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싼타크로스가 서 있다.

'메리크리스마스 ~~~‘

 

참고문헌

.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 (김호동. 까치 2002)

.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최상한. 돌베개. 2012)

. 소설 최치원 (최진호. 집사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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