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관세 우회 전략’ 힘준 트럼프, 세계 무역 질서 흔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호관세 위법 판결 이후 보여주는 행보는 법치 존중이라기보다 정책 강행 의지에 가깝다. 연방대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한 상호관세를 위법이라고 판단했음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와 무역확장법 232조 등 다른 법률을 총동원해 관세 부과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관세 정책의 본질적 재검토보다 법적 우회로를 찾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실제 미 상무부는 배터리, 전력망, 통신장비, 산업용 화학물질 등 6대 산업을 국가 안보 위협 대상으로 규정하고 신규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이다. 무역대표부(USTR) 역시 과잉 생산, 기술 차별,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새로운 조사에 착수했다. 표면적으로는 합법적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보호무역 정책을 다른 법적 틀로 재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세계 무역 질서의 예측 가능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점이다. 관세 정책은 단순한 국내 경제 수단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과 투자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법원의 판단으로 제동이 걸린 정책을 다른 법률로 반복 적용한다면, 무역 상대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법적·정책적 안정성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동맹국과의 경제 협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경제에 미칠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배터리와 전력장비 등은 한국의 핵심 수출 산업이자 미래 성장 동력이다. 미국이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해당 분야에 관세를 부과할 경우,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첨단 산업 경쟁력과 공급망 재편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기업의 투자 계획과 산업 전략 전반에 불확실성을 초래할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관세의 정치화다. 관세는 본래 산업 보호와 공정 경쟁을 위한 제한적 정책 수단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이를 외교 협상과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법적 제약이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근거를 찾아 관세를 유지하려는 행태는 무역 정책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산을 부추길 위험이 크다.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자 자유무역 질서의 설계자였다. 그런 미국이 법적 판단 이후에도 관세 정책을 우회적으로 지속하려 한다면, 국제 무역 규범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미국 경제에도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관세는 단기적으로는 산업을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물가 상승과 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세의 확대가 아니라 정책의 재조정이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고, 동맹과 협력을 통한 공정 경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해법이다. 관세를 통한 압박이 아니라 규범과 신뢰를 통한 협력만이 글로벌 경제의 안정을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