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장강(長江)을 도강(渡江)
이욱은 장강의 천연요새를 이용해 송군의 진공을 막으려 했고, 송군 또한 장강을 건넌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변화가 있게 마련이고 인간의 지혜 앞에서는 장강이라는 천연요새도 탄탄대로로 바뀔 수 있었다.
병법에는 “현지(現地) 사람이기 때문에 이용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현지 사람의 우세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광윤은 바로 남당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이용해 남당이 의지하고 있는 장강이라는 천연요새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번약수(樊若水)라고 하는 선비인데, 남당의 진사시험에서 몇 번이나 낙방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있었다.
번약수는 우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강변에서 낚시질을 하곤 했다. 송나라가 남당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대군이 또한 강북에서 발이 묶여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번약수는 송나라로 가서 자신의 출로를 찾아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송나라로 가자면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는 좋은 책략을 고안해 가져가기로 했다.
마음을 정한 번약수는 장강의 채석기(采石磯)에서 낚시꾼으로 변장하고 명주끈 한 끝을 남안에 맨 다음 작은 배를 몰고 북안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한 그는 장강의 넓이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는 곧 변경으로 가서 상소를 올리고 남당을 공략할 대책과 장강에 부교를 만들어 천연요새를 돌파할 책략을 내놓았다.
이때 마침 조광윤은 어떻게 장강 요새를 돌파할 것인가 하고 고심하고 있던 차에 이 소식을 듣고 즉시 그를 접견했다. 번약수는 조광윤에게 남당이 장강에 설치한 방어선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고, 또 자신이 남당의 진사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되어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하소연했다.
조광윤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학사원(學士院)에서 번약수에 대해 특별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그의 성적은 우수하게 나왔다. 그리하여 번약수를 진사에 합격시키고 서주(舒州) 단련추관(團練推官)으로 임명했다.
번약수가 조광윤에게 장강 돌파책을 내놓았다.
「형호(荊湖)에서 대형 함대를 건조하십시오. 송군이 도강할 때 이 함대들을 장강의 채석기로 몰고 가서 부교로 사용하면 대군의 도강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조광윤은 이 건의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 먼저 석패구(石牌口)에서 함대로 실험해 본 결과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번약수의 건의대로 형호에서 부교로 사용할 대형 함대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욱이 한림학사 장계에게 장강에 부교를 구축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장계가 대답했다.
「신(臣)이 고금의 서적을 다 읽어 보았어도 장강에 부교를 구축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군에서 와전된 소식일 것입니다. 아니면 송군의 장난질일 테지요.」
그리하여 장강에 부교를 설치하는 것은 한낱 어린애의 장난질이라고 여긴 이욱은 수군과 보병 2만 명을 파견해 채석기에서 송군과 대항하도록 했다.
한편 송태조 조광윤은 송나라 수군이 형호에서 강기슭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지주(池州)로 진군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런데 저항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한 남당의 지주 수비장 과언(戈彦)은 해마다 송나라 조정이 정례로 파견하는 훈시병으로 오인하고 위로하려고 고기와 술을 준비해 마중 나왔다.
남당의 도성 금릉을 공격하기 위해 채석기로 진군하는 송나라 수군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저항하려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과언은 성을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지주는 송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974년(태조15) 11월, 조광윤은 명령을 내려 석패진(石牌鎭)에 정박해 있는 부교를 채석기로 옮기도록 했다. 번약수가 그린 약도에 근거해 송군은 채석기에서 이미 건조한 함대로 부교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부교가 완성되기까지 3일이 걸렸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 대군은 마치 평지를 걷듯이 부교를 통해 어려운 장강을 쉽게 도강했다.
조빈의 주력부대는 신속하게 장강을 건너 진회하(秦淮河)에서 남당의 수군과 육군 10여만 명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금릉성 밑까지 육박했다.
이와 동시에 오월왕 전숙도 군사를 친히 통솔해 상주(常州), 강음(江陰), 윤주(潤州)를 공략함으로써, 금릉을 포위하는데 한 몫을 했다. 금릉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립된 섬으로 변했다.
이때 송나라의 보병은 주장(主將) 조빈의 통솔 하에 안휘(安徽)의 동릉(銅陵)에서 남당군과 접전을 벌여 대파하고 200여척의 함대를 노획하고 수군 800여명을 생포했다. 또 연달아 무호(蕪湖), 당도(當涂)를 점령하고 채석기에 주둔하고 있다가 남당군 2만 명을 섬멸하여 이전에 송태조가 하사했던 전마 300여필을 노획했다.
이때 이욱은 가무와 여색, 그리고 시 짓는 데만 심취되어 송군이 육박해 오고 나라가 ‘아침에 망할지 저녁에 망할지 모르는 위기<危在旦夕>’에 처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송나라의 군사적 압력 앞에서 그는 오히려 정사를 문하시랑(門下侍郞) 진교(陳喬)에게 맡기고 군사는 도지휘사(都指揮使) 황보계훈(皇甫繼勛)에게 맡겼다.
어느 날 성루에 오른 이욱은 성 밖에 진영을 친 송군과 산과 들에 나부끼고 있는 송군의 깃발들을 보고, 이때서야 신하들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 군사정보를 숨긴 황보계훈을 질책했다.
황보계훈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북방의 군대는 강대해서 천하무적입니다. 저더러 밤낮으로 보고를 올리라고 한들 괜히 궁 안을 크게 놀라게 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때서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이욱은 진노하여 황보계훈을 참수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욱은 황급히 사람을 남창(南昌)에 보내 진남(鎭南)절도사 주영빈(朱令贇)에게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도(王都) 금릉을 구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주영빈은 즉시 병력 15만을 동원해 왕도로 진군했다.
깃발이 휘날리는 함대는 웅장했고 또 뗏목을 만들어 강에 띄웠는데, 파양호구(鄱陽湖口)에서 장강에 이르기까지 앞뒤로 수십 리에 달했다.
주영빈은 함대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내려와 송군의 부교를 파괴해 퇴로를 차단하려 시도했다. 환구(皖口)에 당도했을 때 송군과 맞닥뜨렸다.
혼란 속에서 주영빈은 송군의 함대를 막으려고 불을 지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북풍이 크게 불어오는 바람에 불이 자신들의 배에 옮겨 붙어 남당군은 대파되고 주영빈과 그의 부장(副將) 왕휘(王琿)는 송군에게 생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