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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33 논산 신풍리 마애불

고정산의 산지기 수호불

(시사1 = 김재필 기자) “이제 이미 공사를 마쳐 보찰을 일신하였으니, 우러러 하늘의 도우심을 받들고 엎드려 여러 신들의 도움에 힘입어 세상을 맑게 하고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한다.”

 

위는 936년(태조 19)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후 940년 황산벌에 속하는 이 지역에 백성들의 위문과 호국을 위하고 태평시대를 연다는 뜻을 가진 개태사(開泰寺)를 지은 후 낙성법회에서 화엄법회소를 직접 쓰고(고려사 절요) 한 말이다.

 

호랑이를 닮은 한반도 지형중 단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논산지역은 계룡산맥과 대둔산이 만나는 분지로 삼국시대부터 무속신앙이 주류를 이루어 사찰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왕명으로 개태사가 창건 된 이후 관촉사, 쌍계사등이 들어서면서 불교의 확산이 활발해져 이 지역에 4구의 마애불(신풍리 마애불, 상도리 마애불, 수락리 마애불, 송정리 마애불) 또한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오늘은 먼저 고정산(145.8m)에 있는 신풍리 마애불을 찾아 나섰다.

승용차로 서울을 출발 해 서논산 IC로 진입하여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고정산 기슭에 있는 ‘휴정서원’까지 가서 주차해 서원을 잠깐 둘러 보기로 하고 3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옆에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중 열려 이는 왼쪽 문으로 들어갔다.

이 서원은 1700년(숙종26)에 창건하였으며 1705년(숙종31)에 준공하여 찰방을 지낸 류무(柳懋)를 봉안하였다. 이후 송익필(宋翼弼, 1534~1599년), 김공휘 (金公輝, 1550∼1615년), 김호(金鎬), 이항길(李恒吉), 김상연(1689~1774년), 김진일, 김우택(金禹澤)을 추가 배향하여 제향해 왔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19년 중건하였으나 1944년 탑정저수지 완공으로 수몰될 처지에 몰려 현재의 위치에 단소를 설치하여 단제를 지내왔다. 1984년 사우(祠宇)를 복설하였으며 1985년 3월 20일 송익필을 주향으로 하여 총 8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이 곳을 나와 계백장군 유적지 방향으로 난 ‘솔바람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돈암서원’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은 솔바람길 끝에서 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100여미터를 올라가니 왼쪽 버덩에 광산 김씨 가문의 무덤이 보이고 50미터정도를 더 올라가니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 할만한 아름드리 적송 한그루가 홀로 우뚝 서 있다.

 

장송, 즉 소나무는 우뚝 높이 솟아 한겨울에도 늘 푸른 모습을 띠는 것에서 동양문화에서 예부터 굳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군자(君子)나 지사(志士)의 뜻이나 됨됨이를 표현하는 식물로 여겨져 왔다. 중국 명사들의 일화집인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에 대해 "혜강의 사람됨은 마치 우뚝하게 빼어난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우뚝하다[嵇叔夜之爲人也, 巖巖孤松之獨立].", "쏴아!하고 소나무 아래의 바람처럼 높다랗게 천천히 부는 것 같다[肅肅如松下風, 高而徐引]."라고 하여,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부정한 사회를 비판했던 지식인을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가지를 뻗치는 소나무에 빗대어 설명한 예가 있다.

이러한 뜻을 품은 휴정서원의 주인공들도 이 소나무를 심어놓은 것은 아닐까?

이 장송은 고정산의 비탈에서 몇 백년의 세월을 이고 살아 왔을까?

헌데도 아직도 청청하다.

 

잠시 온 길을 돌아보니 탑정호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194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44년에 완공된 이 탑정호는 대둔산 물줄기를 담고 있는 충남에서 두 번째로 넓은 저수지로 농사에 필요한 충분한 담수뿐만 아니라, 최근엔 수상레저와 2021년 10월에 완공된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로 관광산업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잠시 물결을 가르는 수상스키를 바라보며 서울에서 여기까지 4시간여의 피곤을 솔바람에 날려 보니 이 길을 ‘솔바람길‘이라 한 연유를 알 것 같다.

다시 카메라 가방을 추스르고 조금 걸으니 신우대 숲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신우대숲은 경주의 불곡 마애불, 해인사 마애불을 비롯해 이번이 세 번째다.

 

’신우대가 자생하고 있는 곳에 마애불을 조성했나? 아니면 인공조림을 한 걸까?’ 이러한 화두를 생각하며 몇십미터 걸으니 안내판에 ’영사암‘이라고 씌인 팔작지붕의 퇴락한 건물이 나타난다.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어 담장 넘어로 들여다 보니 관리 부재로 주위가 어수선하다.

 

영사암은 조선 세조때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과 김겸광 형제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간 시묘살이를 위해 성종 6년(1475)년에 지은 26칸 규모로 세운 사당이었다. 그 후 건물 관리가 어렵게 되자 승려를 두고 독경과 제사를 모시게 하여 수호사(守護)를 겸하게 했다는데, 지금의 건물은 조선 고종 때 새로 건축된 건물로 현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축소되었으나 앞면 창호가 띠살문으로 되어 있어 단아한 모습이다

영사암을 나와 다시 죽향이 번지는 신우대 숲길로 30여미터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넓은 공터에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6개월전에 왔을 때는 논산시에서 문화재 정비차 천막을 치고 이끼류와 지의류(地衣類)를 박리하는 보존처리 공사를 하고 있어서 답사를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말끔한 자태로 합장하듯 두 손을 모으고 밑에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반기는 것 같다.

 

 

고정산 정상 부근에 남쪽 탑정호를 바라보고 있는 마애불은 둘레 10여m가량의 큰 바위 면을 얕게 파내고 면을 만든 다음 돋을 새김과 오목새김으로 조성된 3.5m의 키에 어깨 넓이 1.3미터 규모의 입상이다. 소라 모양의 머리 위에 비교적 높은 육계가 얹어져 있고, 네모진 통통한 얼굴에 반달형의 가늘게 뜬눈, 크고 뭉퉁한 코, 미소가 감도는 꾹 다문 작은 입, 미간에는 백호가 보이고, 귀는 이마 부분에서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고, 어깨와 맞붙어 짧은 목에는 삼도가 가늘게 오목새김으로 표현 돼 있다.

 

좁은 어깨 표현으로 인해 직선에 가까운 불신을 감싼 법의는 통견의로 배 부분까지 늘어져 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했던 도식적인 평행밀집(平行密集) 의문(衣紋)으로 표현되어 있고, 옷의 주름은 가디간을 입은 듯 V자에 가깝다.

옷은 발까지 길게 늘어져 있을 것 같아 입상(立像)으로 추정되는데 무릎 아래부터는 마모가 심하여 분별이 안된다.

막대기 같이 직선으로 표현된 두 손은 마주 잡았는데 마모가 심해 이 또한 수인(手印)을 파악하기 힘들다.

두광이나 신광은 별도로 표현하지 않고 주형거신광(舟形巨身光)을 오목새김으로 표현했으며, 불신(佛身) 양쪽에 불꽃무늬인 화염문 (火炎文)으로 장식 되어 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머리 주위에 교각상과 반가부좌상을 취하고 앙증맞게 앉아 있는 3구의 화불(化佛)이었다.

이러한 모습의 화불은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에서도 볼 수 있는데 화불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는 부처의 다른 모습으로 여래상 주위나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종종 표현하는데 지금까지 답사한 결과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등 17곳의 마애불에서 화불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애불은 옷을 입은 형태를 간략하게 표현한 형식이나 토속적인 얼굴 표현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형식적인 면과 지방양식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 중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답사한 논산의 4구(상도리 마애불, 송정리 마애불, 수락리 마애불, 신풍리 마애불)의 마애불들은 모두 화려하고 권위적인 모습에서 탈피하여 도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선각의 표현기법도 세련되지 않은 투박하고 질박함을 지닌 토속적인 얼굴에서 시골 아저씨와 같은 표현으로 친밀감을 주고 있다.

 

고려전기까지 사찰도 변변히 없었던 논산에 어떤 연유로 마애불이 4기나 조성되었을까?

백제 땅이었던 논산은 신라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여 신라로 바뀌고, 옛 백제의 부흥을 위해 일어난 신검에 의해 다시 후백제로 바뀌는가 싶더니 왕검에 의해 고려로 바뀌는 동안 전란에 민초들의 고난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특별히 이 곳에 내려와 개태사를 창건해 주고 부처의 자비를 뿌리며 위문해 준다. 따라서 심신이 피폐해진 백성들은 심신의 치유를 위해 자연스레 불교를 받아드렸을 것이다. 이러한 불심은 점점 깊어져 마애불을 세워 신앙을 지켜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촬영을 마치고 탑정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으로 맞으며 마애불 정면을 다시 쳐다보니 앙증맞게 앉아 있는 화불이 벌떡 일어나 ’빠이 빠이‘하면서 인사라도 할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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