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천하통일 전략(17)

제2절 황제가 된 후 다섯 차례의 통일전쟁

▶ 송태조 조광윤, 오랜 기다림 끝에 남당 정벌에 나서다

 

송태조 조광윤은 천하를 통일하려 했고, 이것은 또한 당시 천하 백성들의 소망이었고 대세였다.
 
이미 천하의 대부분을 통일한 이상 남당을 그냥 둘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이나 사자를 보내 변경에 조배하러올 것을 요청했으나 이욱이 오지 않자, 조광윤은 인질을 억류하는 방법으로는 남당평정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당통치자가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통일을 거부하고 장강이라는 천연요새에 의지해 저항했기 때문에 조광윤은 부득이 공개적 군사행동을 동원하여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여 평정여건을 마련해 왔던 남당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남당정권과 다른 남쪽의 정권은 절강(浙江) 일대를 점거하고 있는 오월(吳越)이었다.
 
독립을 추구하는 남당의 이욱과는 달리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은 진심으로 송조(宋朝)에 순종했다.

조광윤도 그의 진심을 믿어 주고 성의를 보여 주었다. 조광윤은 공물을 헌납하러 온 오월국의 원수부판관(元帥府判官) 황이간(黃夷簡)에게 말했다.

「당신이 돌아가면 전숙더러 군사훈련을 다그치라고 일러 주시오. 이욱이 고집을 부리고 조정에 들어오지 않아 짐(朕)이 군대를 출동해 남당을 토벌하기로 했소. 오월국이 차질 없이 짐(朕)을 돕도록 하시오.」

조광윤은 오월의 사자 전문지(錢文贄)를 접견할 때도 말했다.

「몇 년 전에 내가 명령을 내려 도성 남쪽에 별궁을 지었는데 이름을 ‘예현택(禮賢宅)’이라 지었소. 이욱이나 당신네 군주가 오면 주려고 지은 별궁인데 누구든 먼저 오는 사람에게 선사하도록 하겠소.」

얼마 안되어 오월왕 전숙은 또 행군사마(行軍司馬) 손승우(孫承佑)를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조광윤은 손승우가 오월로 돌아갈 때 송나라가 남당을 토벌하러 떠나는 날짜를 비밀히 알려주고 전숙도 동시에 출병해 남북에서 협공을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 청렴하고 선한 심성의 조빈(曹彬)을 주장(主將)으로 삼다

 

조광윤은 송군이 후촉에서 범한 죄행을 거울로 삼아 남당에 대한 군사 공격을 실시하기 전에 남당토벌군의 주장을 맡을 인선에 대해 신중을 기했다.

조광윤은 인자하고 선량한 조빈에게 주장의 중임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조빈은 964년(태조5)에 동로군의 부장(副將)으로서 후촉과의 전쟁에 참여했을 때 매우 적은 사상자를 냈다.
후촉에서 노략질한 죄를 지어 경성(京城)에 소환되어 온 북로군의 도감 왕인섬이 과실을 남에게 떠넘길 때도 조빈에 대한 악담은 한마디도 없었다.

왕인섬은 조광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로군과 북로군 중에서 청렴하고 조신하고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조빈 한 사람뿐입니다!」

조광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로군의 병사들도 성을 공략하고 가는 곳마다 대량 살상을 하려 했으나 조빈이 엄중하게 제지했다.
후촉에서 그는 추호도 법을 어기는 행위가 없도록 상하를 철저히 단속했으며, 전쟁을 마치고 귀성할 때 그의 짐 속에는 몇 권의 책과 옷가지들뿐이었다.
 
조광윤은 그를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선휘남원사(宣徽南元使)로 승진시키고 의성군(義成軍)절도사를 통솔하도록 했다. 이에 조빈이 사양했다.

「다른 장군들은 다 죄를 지어 치죄를 당했는데, 어찌 저 혼자만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조광윤이 말했다.

「경(卿)은 큰 공을 세우고도 교만하지 않았소.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은 나라의 법칙인데 그대는 왜 사양하는건가?」

 

통일대업을 이루기 위해 송태조 조광윤은 남당의 항복을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드디어 974년(태조15) 7월 남당에 대한 군사공격을 개시했다.

조빈을 주장으로, 반미를 부장으로 임명하고 수군, 육군, 기마병을 이끌고 장강 채석기(采石磯) 일선에서 도강해 남당의 도성 금릉(金陵)으로 돌진하도록 명했다.
 
동시에 오월왕 전숙에게 명령하여 오월군 5만 명을 이끌고 송나라의 정덕유를 감군(監軍)으로 삼아 남당의 동부에서 상주(常州)를 공격하며, 금릉에서 합류토록 했다.

또 왕명(王明)을 서로군(西路軍) 통솔자로 임명해 형남수군을 이끌고 동쪽의 무창(武昌)으로 진군해 강서(江西)에 주둔하고 있는 남당군대를 견제하도록 했다.

사실상 이욱은 뼛속에서부터 송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강남에 계속 할거하면서 소황제의 위치를 확보하고 유람과 향락을 한껏 즐기는 생활을 계속 유지하려고 꿈꿨다.

그러나 조광윤이 그의 단꿈을 부숴버리고 인정사정없이 군사공격을 개시해 남당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이상, 이욱도 나약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송나라 ‘개보(開寶)’ 연호를 없애도록 명하고 임시연호인 ‘갑술세(甲戌歲)’를 사용했다. 동시에 백성을 동원하고 군대를 징모해 송나라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이욱은 장강이라는 천연요새에 의지해 송조(宋朝)에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청휘전학사(淸輝殿學士) 장계(張洎)에게 밀서를 갖고 거란의 지원을 요청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송군이 금릉을 포위하고 있어 그는 도성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자 이욱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한림학사 서현(徐弦)을 파견해 송나라 변경(汴京)에 가서 뛰어난 응변술(應辯術)로 조광윤과 강화를 시도했다.

변경에 온 서현은 송태조 조광윤을 알현하고 말했다.

「우리 군주는 대송(大宋)의 신하로 자처하고 그동안 공손히 송나라를 섬겨왔습니다. 단지 병환으로 조정에 들어가 알현하지 못했을 뿐 조령을 거역한 것은 아닙니다. 조정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소방국(小邦國)을 토벌하는 것은 실로 명분이 없사오니 조정에서 공격을 중지시키고 저의 작은 나라를 부디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조광윤이 말했다.
「당신네 군주가 병환으로 조현을 못하니 짐(朕)이 응당 금릉에 가서 병문안을 해야 할게 아니요?」
서현이 말했다.

「우리 군주가 대국을 섬기는 것은 마치 아들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과실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칼부림을 하시는 겁니까?」

조광윤이 말했다.
「부자지간이라면 왜 남과 북 두 집으로 분가해야 하오?」
서현이 말했다.
「우리 군주는 조상이 남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할 뿐인데 구태여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광윤이 말했다.
「천하가 한 식구인데 어찌 침소(寢所)에 타인이 잠자게 할 수 있겠소?!」

서현이 아무리 박식하고 말재주가 뛰어나다한들 통일대업을 성사시키려는 조광윤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