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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9-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중국과의 바닷길을 지키는 수호신

 

(시사1 = 김재필 기자) ‘교수님 저의 마을 뒷산에도 부처 그림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유’

 

대학에서 ‘서산 마애삼존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의 일화는 한국 미술사학자 정영호(1934~2017.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 겸 석좌교수) 박사가 들려준 것으로 내가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문화관광해설사 고종남씨에게 들은 얘기다.

 

그 말을 들은 조사팀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환희와 기대속에 단숨에 달려간 그들은 태안시장에서 짜장으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험한 길을 40분여를 올라가 태을동천 맞은편에 17도 정도 기울어진 삼각형의 큰 바위에 빗물을 피하기 위해 사각으로 판 감실안에 서 있는 마애불을 친견했었으니 그 때가 1960년대 초였다.

 

그 후 마애삼존불입상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으며 불상 하체 부분과 연화대좌를 덮고 있던 토사를 걷어 내고, 재정비를 하여 전신이 드러난 완전한 모습을 갖추면서 학술적 조사 및 연구와 고증을 거치고 태안군의 품의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국보 제84호)‘에 선행하는 조형 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삼존불입상'으로써 재평가 받아 보물 제432호에서 2004년 국보 제307호로 승격되었다.

 

현존하는 백제시대의 마애불은 ‘예산화전리사면불’ 및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과 함께 3곳뿐인데 모두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헌데 왜 이 지역에만 마애불이 조성 되었을까?

백제 시대에 서산 태안 지역은 중국 산동반도와 가까운 교역로써 서해안을 통한 해양무역이 성행했으며, 이 지역을 통해 중국에서 들어 온 사람과 물목들이 사비성(부여)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당시 바닷길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여정으로 일찌기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의 백성들은 부처님에게 바닷길의 안녕을 빌었다. 따라서 그 전까지 바위신앙에 기대었던 백성들의 염원은 불교의 발달로 교역로 근처의 바위에 마애불을 새기어 그 곳을 오가는 남편과 아들등 가족의 안전과 가문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했을 터, 태안의 ‘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도 서산의 ‘용현리마애삼존불’과 함께 같은 맥락에서 조성되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위치한 태안의 진산 백화산(白華山 284m)은 태안 팔경중 첫째로 꼽히는 곳으로 태안읍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나 백제시대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한다.

백화산 8부능선 쯤에 자리한 태을암까지는 차도가 비교적 잘 닦여져 있다.

 

차에서 내리니 마애불 안내판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탐방객들에게 해설하고 있었다.

나는 중간에서 끼기가 어색하여 일단 태을암 마당을 지나 30여m쯤 걸어가니 사비성을 향한 동남방향으로 위치한 마애불이 있는 보호각이 보인다.

 

보호각에서 참배객을 맞이하는 마애삼존불입상.

6세기 말쯤 조성되었다니 1,500여년의 세월의 흐름 속에 얼굴을 포함한 전신은 풍파에 마멸되고, 이제껏 탐사했던 여타 마애불처럼 불상의 코와 귀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옛 민간신앙으로 인해 얼굴이 손상되어 보기에 안쓰러움이 다가온다.

 

불상들은 차라리 원각에 가까울 정도의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었으며, 서산의 마애삼존불보다 좀 거칠고 세련미는 덜 하지만 한참을 자세히(나는 이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싯귀가 떠 올랐다) 들여다보니 마모된 얼굴인데도 이마에 백호공의 흔적이 보이고 살짝 패인 입가로 인해 고졸한 미소가 잔잔하게 배어 나와 ‘제2의 백제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미리 예습을 하고 찾아 가 본 것이지만 삼존불상하면 중앙에 본존불이 좌우에 협시보살이 배치된 ‘1여래 2보살’인데 비해 이 곳의 삼존불은 중앙에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으고 봉보주를 받치고 있는 2.01m 높이의 보살입상 1구와 오른쪽에는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여원인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모습이다.

 

여원인은 여인(與印)이라고도 하며 부처가 중생에게 대자(大慈)의 덕을 베풀어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수인이다)의 손 모습을 한 불입상이, 왼편에는 손에 보주(혹은 盒)를 든 불입상이 배치된 ‘1보살 2여래‘로 전무후무한 파격적 형식으로 구성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도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삼존불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보주를 든 현재불인 석가불과, 나란히 대칭되게 서 있는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 사이에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삼존 형식을 이룬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마애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법화경” 사상을 근거로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촬영을 하면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오는 전체상을 보고 있노라니 중앙에 있는 보살상의

연화대좌가 여래상의 것보다 작으며 또한 양옆 가장자리가 여래상의 연화대좌에 가려진 것을 보고 감탄했다.

 

중앙의 보살이 좌우 여래를 뒤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는 모습인데 원근감을 적용하여 마애불다을 새긴 석공은 분명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리라.

 

보호각 칸막이 사이로 비스듬하게 들어 온 5월의 푸름을 머금은 햇살이 부처의 손길처럼 한 참배객의 등을 토닥여 준다.

1,500여년의 지난한 세월의 풍파에 크게 훼손된 마애불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채 그 곳을 나오니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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