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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기다림"

리투아니아에서의 해프닝

한세상 살아가노라면 일도 많고 탈도 많다. 사람마다 근기와 경험과 형편이 다르니 대처방법도 다르다. 지난 연말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반도 여행 중 뜻밖에 관광버스가 고장나는 바람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유럽사람들이 놀랄만한 참을성을 가지고 “아름다운 기다림을 통해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지혜로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사람들이라면 이때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유럽은 대개 가톨릭나라여서 12월초부터 온 시가지는 “크리스마스-트리, 마켓, 파티와 페스티벌”로 축제분위기가 한달 이상 계속된다. 크리스마스기간에는 강의도 없어 방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뭣해 나는 “이한치한(以寒治寒)”으로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엄동설한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북유럽의 발틱(Baltic) 3국 리투아니아(Lithuania), 라트비아(Latvia), 에스토니아(Estonia)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핀란드(Finland)를 여행했다.  

 

나는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를 떠나 발틱 3국의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핀란드 헬싱키까지 장장 왕복 3,300여km를 6박 8일(버스에서 2박) 동안 버스로 설국여행(雪國旅行)을 하던 중 리투아니아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다림”과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맛보았다. 크라쿠프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공업단지 카토비체, 수도 바르샤바, 환상의 호반도시 아우구스투프 등 여러 도시를 거치면서 폴란드관광객 35명을 싣고, 폴란드 북동쪽 리투아니아 제2도시 카우나스(Kaunas)를 관광한 후 17시간 만에 라트비아국경에 인접한 비르자이(Birzai)에 도착할 무렵 버스가 고장나는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 속을 헤치고 꽁꽁 언 빙판길을 장시간 달리는 동안 강추위로 인해 가스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카로운 얼음판에서 타이어까지 손상됐던 모양이다. 고장 난 버스는 수북이 쌓인 눈길을 뒤뚱거리며 한참을 달린 후 저녁식사를 위해 비르자이 숲 속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 알라우스 켈리아스(Alaus Kelias)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우리가 저녁 식사하는 도중에 관광가이드는 지금 운전기사 2명이 버스를 고치고 있지만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면서, 다른 버스로 바꿔야 하는데 외국이라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모두들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녁을 먹은 후 버스로 가서 짐을 가지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새로운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행 첫날부터 이런 변을 당했으니 앞으로 1주일간의 여행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고 그냥 체념하고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딱한 상황이었다.

 

  특이한 점은 일행 30여명 중 아무도 가이드에게 불평을 하거나 항의하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장시간 버스를 탄 탓에 지치고, 언제 떠날지도 몰라서 코가 댓 자나 빠져 있는데, 그때 일행 중 키 큰 신사 한 명이 레스토랑주인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지금부터 다른 버스가 올 때까지 즐거운 연말 페스티벌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놀라운 반전(反轉)이었다. 

 

곧 이어서 리셉션데스크의 텔레비전이 켜지고 화면과 함께 흥겨운 가락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맨 처음 두 팀의 부부가 의자를 밀치고 공간을 마련한 후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멋들어지게 춤추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두 부부가 넘치는 끼를 발산하면서 노련한 춤사위로 흥을 돋구자 자리에 앉아 바라보고만 있던 이들도 한 쌍, 두 쌍 나가기 시작하더니 단숨에 뜨거운 연말페스티벌 분위기를 이루었고, 레스토랑주인이 돌아다니며 신청곡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젠틀맨>을 신청했다. 역시 싸이는 세계적인 스타였다. 북유럽의 낯선 나라 리투아니아에서도 그의 노래는 인기만점이었다.

 

잠시 후,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 나와 <강남스타일>을 함께 부르고 춤을 추면서, 나를 안으로 끌어 당겼다. 나는 생전 춤을 추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머뭇거렸으나, 자꾸만 권하는 바람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인터넷으로만 봤던 말 타는 흉내를 내면서 이리 뒤뚱 저리 뒤뚱거리자 사람들은 웃음바다를 이루면서 순식간에 한마음이 되고 가까운 친구가 되어버렸다.

오후 6시쯤 레스토랑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 후 곧바로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끊임없이 춤추며 노래하고 술 마시며 기다린 끝에 한밤 중인 12시 반에야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하여, 우리는 감격한 나머지 모두 버스로 달려가 짐을 싣고 출발하기가 무섭게 눈을 감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관광가이드의 안내방송으로 잠을 깨어 보니, 버스는 이미 라트비아(Latvia)의 최북단 발티해에 붙어있는 수도 리가(Riga)에 도착했는데, 이미 새벽 3시가 다 되었다.

나는 이번 꿈만 같은 페스티벌해프닝을 지켜보면서, “이들은 참으로 한국사람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깜깜한 밤중에 레스토랑이라고는 하지만 깊은 숲 속에 그것도 두터운 눈 속 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갇혀버렸을 뿐만 아니라,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가이드에게 화내며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되겠지요. 기다려 봅시다.” 배려하면서 위로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나서 무려 6시간동안 연말페스티벌을 하는 동안, 그들은 문제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치 예정된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즐기는 행복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의 표정은 버스고장도 없고, 새로운 버스가 언제 오건, 나머지 여행일정이 어떻게 되던 문제 없고, 오직 행복감 속에서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속담에 “홍두깨 세 번 맞아 담 안 뛰어넘는 소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들의 참을성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

결국 우리 30여명의 일행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처음 만나 모두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6시간동안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 추면서 갑자기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덕분에 남은 1주일 여행일정 동안 모두가 화기애애한 가운데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설중여행(雪中旅行)을 민끽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곳곳에서 버스를 세우고 몇몇 사람들이 작별을 고할 때마다 많은 이들은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못내 아쉬워하면서 어둠과 추위 속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기다림의 미학(美學)”을 몸으로 실천하여 “불쾌함을 유쾌함으로, 지루한 기다림을 즐거움으로, 좌절감을 행복감으로 바꾸는 지혜로움”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번 여행 중 아름다운 해프닝을 보면서, 강태공(姜太公)이 인재(人才)를 기다리며 낚시바늘과 미끼조차 없는 낚시대로 하염없이 세월을 낚았던 일과 삼국지에서 유비(劉備)에게 연속 패배하면서도 언젠가 승리할 때만을 바라고 끝내 참고 기다렸던 강동의 오(吳)나라 육손(陸遜)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해프닝을 지켜보면서, 폴란드사람들은 오랜 세월 공산주의 치하에서 각기 지닌 열정을 참고 숨기며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있었고, 급속한 경제성장과정에서 얻은 조급함과 민주사회에서 거리낌 없이 열정을 발산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밝고 어두운 면을 공유하고 있고, 모든 일이 잘 잘못을 함께 갖고 있으니, 서로가 상대방의 잘난 점과 못난 점을 공히 스승으로 삼는다면 서로 물고 뜯는 각박한 사회에서 벗어나 보다 여유 있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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