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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난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메시지

독일에서 난민과 함께 한2박4일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다. 어제 무슨 일이 생겼던지,오늘 무슨 일 생기든지 세상은 그냥 어딘 가로 굴러 간다.


세월 또한 마찬가지다.어제 무슨 일이 생겼던지,오늘 무슨 일 생기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을 향해 마냥 흘러 간다.

때로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께서 “왜 만물이 함께 오순도순 평화롭게 사는세상을 설계하지 않고,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으로 설계하여 피에 굶주린 강한 자들이 약하고 순한 자들을 잡아먹고 살게만드셨는지?” 살만치 살았는데도 그 깊은 뜻은 도무지 모르겠다.

요즘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IS테러와 정치권력싸움으로 날로 전쟁이 치열해지는시리아 등 중동 난민(難民)들이 모진목숨을 보전키 위해 모국(母國)을 탈출하여 독일에정착하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독일 갈 기회가 있으면이들을 한번 만나보고 가능하다면 함께 지내봐야겠다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10년전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동방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그 곳에서 일제학정(日帝虐政)을 견디다 못해 난민이 되어 만주로 연해주(沿海州)로 떠돌다가,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1937년 우즈베키스탄까지 끌려와 정착해 살고 있는 우리 민족 “고려인”(까레이스키)을 만나서 그들이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픈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어렵게만 보였던 독일통일이 1989년부터 시작된 동독주민의 대량 탈출로 갑자기 이뤄졌듯이, 만약배고픔과 인권탄압을 견디다 못한 북한주민들의 대량 탈북(脫北)사태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주제넘은 생각이 들어서, 비록 부분적인 면만 보겠지만 그래도 난민들의 실상은 어떤지, 무엇이 가장 문제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나는 2015년12월 2일 독일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대학에서 한국학 공개특강을 마친 뒤 독일친구들이 기다리는 인구 5천명의 소도시 바트 보클렛(Bad Bocklet)으로 갔다. 그곳에는 시(市)정부가 지난해 11월부터 3곳에 “난민캠프(refugee camp)”를 설치하고 1년여 동안 수백 명의 시리아,팔레스타인 등 중동(中東)난민과 코소보(Kosovo), 그루지아(Georgia) 난민들에게 숙소, 식생활, 의료,안전,자녀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었다.

12월 4일 오전,나는 독일친구 헤르만(Hermann H)씨 부부와 함께 제과점에 가서 20여명이 먹을 만큼 빵과 케이크를 산 다음 난민캠프를 찾았다. 그런데 그 곳은 말이 “난민캠프”지 뜻밖에 깨끗하고 아담한 3층건물이었다. 알고 보니,그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쿠르펜션 포스트(Kurpension Post)”라는 호텔이었다. 이를 보면서 “아,독일은 생각 보다 난민에 대한 배려가 참 따뜻하고 깊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건물에 들어서니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난민들이 함께 공동주방에서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주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리아사람들과 팔레스타인사람들은 호떡처럼 생긴 밀가루반죽 위에 잘게 썬 붉은 야채를 넣어 굽고 있었고,발칸반도 코소보(Kosovo) 사람들은 우리 만두보다 큰 모양의 야채만두를 찌고 있었다.중동사람들은 무슬림(Muslim) 전통에 따라 돼지고기는 일체 먹지 않고 주로 야채를 먹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이들은 평소에는 나라별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도 따로 한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끼리 함께 섞여 살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심각한 “트라우마현상”: 난민들이 겪은 생명위협 고통으로심한분노 증오표출

일단 식사가마련되자난민들은 응접실 겸 식당에 모여 그들이 만든 음식과 우리가 사간 빵과 케이크를 함께 차려놓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식사가 막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코소보 소녀(16)와 엄마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서 먹을 생각도 잃은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유인즉, 열살배기 팔레스타인 여자애 사라(Sara)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보다 6살이나 많은 코소보 소녀에게 “이 쌍년!나쁜 년!” 고래고래 소리치며 귀싸대기를 마구 후려갈겼다는 것이다. 문제아(問題兒)사라는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혼자서 공연스레 분주히 들락거리며 간간히 서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코소보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껌벅거리며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냐 하면, 사라 아버지는아주 난폭한 사람이어서 조금이라도 사라를 언짢게 했다가는 감당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아,난민들에게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게 남의 일만은 아니구나!” 하는 노파심(老婆心)이 뇌리(腦裏)를 스쳤다.

그렇지만, 헤르만씨 부부의 사라에 대한 설명을듣고 나서는“이 난폭한 팔레스타인 부녀(父女)를 마냥 탓할 수 만은 없구나!”하는 침통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 팔레스타인 일가족은 부부와 2남1녀로 모두 5명인데, 지난해 11월 아버지가 사라만을 데리고 오랜 세월 이스라엘과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을 빠져 나와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난민중개인(難民仲介人)에게 큰돈을 주고 조그만 배를 탔다는 것이다.

다른 난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잘 산다는 유럽으로 가려고지중해를 건너던 중 그만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아버지는 딸의 생사도모른 채 4시간동안사력을 다해 바닷속을 헤엄치다가 마침내 이탈리아경비정에 발견되어 가까스로 구조됐는데, 꿈 같은 일은 이미 구출된 사라가 그 경비정에 타고 있어서 부녀간에 끌어안고 마냥 울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들은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후 배고픔과 무서움과 피로를 참으며멀고 먼 길을 걷고 걸어서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마침내 독일 바트 보클렛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때까지 팔레스타인에 남아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부인과 아들 2명에게 연락하여 얼마 전에 가까스로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가슴 찡한얘기였다.

지난해 11월 그들 부녀가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해도 아홉살배기 사라는 중동난민들 중에서 가장 빨리, 불과 4주만에, 독일어를 익혀서 통역을 톡톡히 해냈던 “천재”이고, 독일사람들은 누구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라에게 접근했고, 사라는 정말로 예쁘고 착해서 모두들 “천사”또는 “영웅”으로부르며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사정은 급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똑똑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라가 바닷속에 빠졌을 때 겪었던 생명위협과 심한 고통으로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적으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정신적으로 악화되는 소위 “트라우마(trauma)”에 걸려서 느닷없이 성격이 난폭해지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라는 건물 복도 중간에 통로를가로막고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건물계단을 때려 부수기도 하고, 물건을 창 밖으로 내던지기도 하고, 정원의 화초를 모두 짓밟아 엉망진창을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공연히 욕하고 때리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정말 천사 같은 사람으로 1년 넘게 변함 없이 난민들을 따뜻하게 보살피고 있어 난민들이 모두 “천사할머니(Angel Oma)”라고 부르는 헤르만씨의 부인 유타(Jutta H)와도 사라는 각별한 사이였는데,어느 날부터인가 표독하게 “이 똥 같은 독일 년아! 에이 나쁜 년! 씨발 년!” 하며 악을 써서 더 이상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호텔주인 유르건(Jürgen)씨의 어머니는 80세가넘었는데 사라는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야,이 늙은 년아, 개 같은 년아, 왜 안 뒈지고 여태 살아있어? 빨리 뒈져버려!” 하고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다른 한편으로는 코소보 어린애들을 시도 때도 없이 마구 때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모두들 사라를 한결같이 미워하게 됐고 그 애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사라는 사랑스런 천사(天使)에서 기피대상의 악동(惡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라아버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흉포해지기 시작했단다. 며칠 전에도 그는 길가에 지나가는 젊은 독일여성의 멱살을 잡고 칼로 찌르려고 위협해서, 경찰에 신고하여 사건은 가까스로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행동이 트라우마에 의한 행동으로 보고 체포하거나 구속하지 않고 사실만을 심문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마도 트라우마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일이 다 구속하려면 유치장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독일사람들은 선의의 난민구제가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남북통일이 되더라도 70년간 다른 이념, 체제, 사회제도, 경제여건, 생활방식과 경험을 했고, 통일 후 느낄 수도 있는 남북간 차별의식 등으로 어느 정도 사회혼란이 예상되는데, 거기에 더하여 북한주민들이 탈북(脫北)과정에서 겪은 고통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면 사회는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빠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면서 증세가 금방 나타나는 것도 아닌 모양이니, “정부는 최소한1년동안은 이점에 유의하여 세심히 관찰하고 누구라도 증세를 보이면 바로 치료에 들어가는 “예방의료시스템과 사회안전시스템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리하여, 나는 난민들과의 첫날 만남에서 예상치 못했던 충격을 받은 채, 다음날 다시 찾기로 하고 일단 헤르만씨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사라 부녀(父女)에 대한 생각으로 뒤척거리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헤르만씨는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난민들에게 위급한 일이 생겨서 경찰이 출동했다고 하니 빨리 난민캠프로 가서 사태를 중재해야 하겠다며 부리나케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얼마간 혼자 남아서 이 생각 저 생각 상념에 잠겨 있노라니, 갑자기 마당 안으로 자동차 2대가 들어 닥치고 코소보난민 12명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리하여 헤르만씨 집은 순식간에 15명이 함께 숙식하는 임시난민캠프로 변해버렸다.

그때 놀랄만한 일은 헤르만씨 바로 옆집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는지,모녀가 이불과 담요 그리고 먹고 마실 것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서는 내려놓고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하면서 총총히 돌아갔다. “아,독일사람은 참 인정이 참 많기도 하구나!”

그들이 숨을 고른 다음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니,전날 우리가 돌아온 후 사라가 코소보소녀에게 귀싸대기를 때리며 행패를 부린데 대해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런데 그날 이른 아침에 사라 아버지가 코소보 젊은 청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찌르려고 해서, 운동선수였던 그 청년이 그대로 강 펀치를 날려 그는 코피를 흥건히 쏟으며 땅바닥에 나뒹굴었고,가족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그는 경찰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가 병원에서 다시 돌아오면 또 다른 불상사가 우려되고 코소보사람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헤르만씨와 호텔주인 유르건씨 자동차에 난민 12명을 나눠 태우고 헤르만씨 집으로 “피난 중에 피난”을 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난민들과 며칠간 함께 생활하면서 가까워지고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헤르만씨 집에 대피했던 그들은 내가 독일을 떠나온 다음날, 경찰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라네 식구들 5명을 42km 멀리 떨어진 다른 난민캠프로 옮긴 후 코소보사람들은 안전하게 종전에 있었던 호텔로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 독일에 체류 중인 “코소보난민”들의 애환(哀歡)
<왜, 정든 모국 코소보를 떠나야만 했나?>

코소보(Kosovo)는 발칸반도 중부(그리스 북쪽) 육지로 둘러싸인 인구 200만도 안되는 작은 나라이다. 코소보는 10여년전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와 격렬한 전쟁을 치른 후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정치안보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이다. 우리나라는 코소보를 국가로 승인은했지만 아직 외교관계는 없는 실정이다.

나는 독일에서 시리아와 코소보난민들과 2박4일을 함께 지내면서 그 중 나이 많고 우두머리 격인 아곤(Agron, 44)에게 “왜 정든 코소보를 떠나야만 했는가?” 물어보니, 가장 큰 이유는 코소보가 유고슬라비아와 치른 심한 전쟁으로 대부분의 국토와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실업률이 75%를 넘어 일자리는 없고, 생계는 어려운데, 전쟁 후 권력을 잡은 현정권은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아예 돌보지 않고 자기들 배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면아이들 실력은 전혀 상관없고 대학총장에게 무려 1만 유로(1,300만원 상당)를 줘야만 입학허가를 내준다는 식이다.

이 돈은 코소보사람들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큰 돈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독일 등 선진국 대기업들이 코소보에 투자하면, 경영권은 권력과 유착된 코소보기업인이 갖게 되고 그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어렵사리 취직이 되더라도 생계는 역시 어렵다는 것이다. 전쟁공포증, 전쟁후유증, 없는 일자리와 있어도 노동착취 당하는 직장, 자녀교육이 불가능한 여건 등 여러 요인이 겹쳐 그들로 하여금 정든 모국을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

아곤(Agron)은 70세가 훨씬 넘은 부모들이 “우리 걱정은 말고 너희들이나 애들 데리고 어디든지 가서 잘 살아라.” 하고 등을 떠밀어서 떠나 오기는 왔지만, 부모들이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어렵고 정부에서 힘든 강제노역을 시키는데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자기들이 독일에서 자리잡으면 부모님을 모시고 오고 싶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독일에서도 머지 않아 쫓겨 나야 할 판이다.

막상 이상향(理想鄕)이라고 믿었던 독일에 와서 보니,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말과 글을 배우려면 상당기간이 걸리는데, 독일정부는“난민들이 첫발을 디딘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더블린조약(Dublin Regulation, 1990)에 의거 그들을 귀국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미 직장을 구한 사람은 문제가 없고, 아픈 사람은 인도적 차원에서 치료를 위해 유예기간을 주고 예외를 인정하고 있으며, 돌아가기 전까지 최소한의 생활을 지원하고자녀들에게는 무상교육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때 난민의 경우,공식적으로 등록된 회사에는 취직할 수 없고 개인사업자만이 이들을 채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독일정부로부터 귀국압력을 받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들의 간절한 꿈은 독일여권을 갖는 것이며, 가능하다면 독일에 남아서 직장도 구하고, 독일영주권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독일여성과 결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유럽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IS테러 영향으로 독일여성들이 중동 및 발칸사람들과 사귀기를 꺼려해서 그것마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딱한 사정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딱한 처지>
이들과 며칠 동안 함께 지나다 보니, 15세 소년부터 거의 모두가 틈만 나면 마당으로 나가서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뿜고 있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으면 저렇게 담배를 피워대야만 하겠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난민들이 어려운 형편으로 어떻게 담뱃값을 감당하는지 궁금했다.

말보로(Marlboro)를 피우고 있는 청년에게 1갑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6유로 조금 넘어요.” 한다. 6유로면 우리 돈으로 약 8천원정도인데 하루에 2갑 가까이 피우는 듯했다. 헤르만씨 부부에게 듣기로는 시정부에서 이들에게 1인당 월 280유로(36만원)의생계비를 지급한다는데, 하루 1갑이면 19만원,하루 2갑이면 38만원이 된다. 이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 밤 자연스레 의문이 풀렸다. 한 청년이 어둠 속에서 부지런히 호치키스(stapler)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넣고 다듬길 계속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잘게 썬 잎담배를 필터가 붙은 얇은 종이 속에넣고 직접 까치담배를 만드는 중이었다.

엽연초 통을 들여다보니 값이 10유로 정도되는데,이 것으로 담배를 7~8갑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엽연초 한 통으로 담배 8갑을 만든다면, 한 갑에 대충 1,600원 꼴로 일반 담뱃값의 5분의 1이 되는 셈이다. 역시궁즉통(窮則通),“궁(窮)하면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요즘 한국은 담뱃값이 두 배 가까이 급등했고, 흡연자가 설 곳이 점점 줄어들다 못해 거의 멸시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데, 만약의 경우 탈북난민이 급증한다거나 남북통일이 된 이후에도 담배를 피우기 어렵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심각히 재고(再考)해 보아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민들은 견디기 힘든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경험했고, 필경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차별을 느끼게 될 텐데, 그들의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 담배 피우는 것이라면 그것 마저 억제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들 중 유난히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한 청년이 있어서 헤르만씨 부부에게 왜 그러는지 슬그머니 물어보았다.그러나 대답을 듣고 보니, 차라리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아는 척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멈칫거리며 입을 열었다.

독일에서 건축공예가가 되는 것이 목표인 그 청년은 얼굴도 잘 생기고 웃을 때는 정말 천사 같이맑은 얼굴이었고, 재주가 비상하여 독일공장에서 도저히 못 고친다고 내버렸던 고물 트랙터(tractor)를 주어다가 고쳐서 농민들이 쓰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다수 난민청년들의 꿈인 독일영주권을 얻기 위해 어렵사리, 그것도 잘난 인물 덕분에, 한 예쁜 독일처녀를 만나서 애인 사이가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하여 그녀의 집에도 자주 찾아가서 부모들과도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애인이었던 독일처녀가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살 동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차마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여인 역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독일영주권을 얻으려던 영롱(玲瓏)했던 꿈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지금은 가끔씩 그녀의 부모들과 함께 꽃을 들고 묘지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온다는 얘기였다. 난민으로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있을 때 누군들 담배를 피우지 않고 배겨낼 수 있으랴……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난치병(難治病) 2살배기 아기를 둔 젊은 부부의 딱한 이야기>

 

코소보난민 중 또 가슴 아픈 얘기는 두살배기 남자아이 “엔젤”에 관한 이야기다. 20대 중반의 말로쿠(Maloku) 부부는 세살배기 딸과 두살배기 아들 “엔젤”을 두고 있는데, 엔젤은 태어날 때부터 왼쪽 신체부위가 모두 마비되어 고개를 가누지도 못했으며, 반신불수(半身不隨)의 상태로 왼쪽 눈은 흰동자만 보인 채 깜박거리지조차 못하는데, 그 원인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들이 난민이 된 원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엇보다도 의료선진국인 독일에 가서 엔젤을 고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년 11월 겨우 한살이 된 엔젤과 두살배기 딸을 데리고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독일 바트 보클렛에 도착했지만, 그 놈의 웬수 돈 때문에 진료와 치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독일정부의 코소보난민에 대한 귀국원칙 때문에 등 떠밀려 돌아가야 한다고 걱정하면서 젊은 엄마는 매일 엔젤을 끌어안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이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헤르만씨 부부가 엔젤 부모를 데리고한 병원을 찾아서 의사에게 진료상담을 하였더니, 그 의사 역시 선한 사람이라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치료비는 너무 비싸서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무료처방은 물론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250유로(약32만원)를 주고 1년분 약을 사서 엔젤 부모에게 주고는 매일 먹여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1년이 지난 후에는 처음 왔을 때보다 고개도 어느 정도 가눌 수 있고 가끔 소리 내어 웃기도 하는 등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아직도 왼쪽 눈동자는 흰자만 보이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늘 실성한 아이처럼 보였다.

올해 다시 그 의사에게 다시 찾아가봤지만,자기도 더 이상 선처를 베풀기 어렵다고 하여 엔젤의 치료를 도와줄 독지가(篤志家)를 구하고 있다고 하는 안쓰러운 사연이었다.

● “독일사람이 보는 독일”: 헤르만씨의 견해

밖에서 보는 독일과 안에서 보는 독일은크게 다른 모양이다. 독일사람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만,세계적 대기업의 중역으로 있는 헤르만씨가 보는 독일과 독일체류 난민문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독일은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줄곧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적 인물로 보는 앙겔라 메르켈총리에 대해 “그녀는 독일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고 하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왜냐 하면,그녀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미국 오바마대통령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의견을 물어 본 다음에야 결정한다는 것이다.

헤르만씨는 평소 난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주고 있지만, 메르켈총리의 난민정책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더블린조약에 의하면 난민이 처음 입국한 나라에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데, 메르켈 정부는 3~4개 나라를 거쳐서 독일에 도착한 사람들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블린조약 12개국 중 유일하게 독일만이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모두 독일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자기만 생색내는 꼴이라는 얘기다. 그의 얘기로는 2015년 1년 동안독일에 입국한 난민이 이미 100백만명을 돌파했고, 지금까지 수백만 명에 이르러 1989년 동독주민 대거 입국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일경제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독일의 인구구조는 “버섯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젊은 층은 점점 줄어들고 고령층만 늘어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대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인 난민들을 취업만 시킬 수 있다면 독일경제구조를 연소화(年少化)시킬 수 있는 “윈윈전략(win-win strategy)”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문제는 “대부분 난민들은 오랜 전쟁 후유증으로 교육수준이 낮고, 말도 글도 안 통하고, 기술 또한 없어서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최근 독일과 코소보간에 경제협력에 관한 장관급회의가 있었는데,양국이 공히 내거는 명분은 “경제협력”이지만,코소보는 “난민취직”, 독일은 “경제활동인구 증대”가 목표라고 했다.

그밖에,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수백만 명이 넘는 난민을 수용하다 보니, 국가안보와도 직결된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다고 했다. 왜냐 하면,“전쟁을 수없이 겪은 중동 난민들은 대부분 참을성이 없고 성격이 난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팔레스타인 부녀처럼 “트라우마”에 걸린 난민들이 독일사회를 불안케 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종교적으로도 대부분(68%) 크리스천(Christian)인 독일에 거친 성격의 무슬림(4%)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도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실제로 베를린(Berlin)이나 쾰른(Köln) 같은 대도시에 난민집중거주지역이 생겨났는데, 이곳에는난민들이 방어벽을 구축하여 독일 사람이나 경찰까지도 들어 갈 수 없게 되어 거의 자치지역화되는 생각지도 못했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States in the State” 즉 독일 속에 다른 나라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독일정부는 언제까지 이를 마냥 지켜 보고만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이런 나라에서 살기 싫어서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Scotland)나 대서양의 조그만 섬으로 들어가서 마음 편히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이것도 우리에게 주는 심각한 메시지다. 남북통일 후 예상치 못했던 사회적 혼란에 의해 “남북”이 아닌 “동서남북”으로도 갈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시(豫示)하는 메시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끼리 치받고 싸우는데 익숙한 우리의 경우 통일이 된다면 더 많은 파당(派黨)이 조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맺는 말:난민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메시지

갑작스런 대량 탈북사태나 남북통일 이후에는 우리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한 사회혼란과 국가안전에 빈틈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정부와 관련 단체에서는 철저한 대비책을 미리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우선, 트라우마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의료체계 확립과 그들이 야기할 수 있는 사회혼란에 대비한 사회안전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70년간 다른 이념, 체제, 생활방식, 경제수준 속에서 살아 왔던 남북한 주민들이 차별의식을 떨쳐버리고 마음으로부터 하나가 되어 똘똘 뭉칠 수 있도록 통일정부의 깊은 배려와 만전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독일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빨리 분단 45년만에 통일되었고 경제수준도 우리 보다 훨씬 높았지만, 통일 후 25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동독출신 주민들은 “우리는 2류국민”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 난민과 독일이 보내는 교훈적 메시지를 곰곰이 새겨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끝으로, 나는 난민들과 2박4일을 함께 한 후 독일을 떠나올 때, 누구라도 처음 취직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 하면서 선물용 넥타이를 아곤(Agron)에게 주었다. 그와 함께 호주머니에 남은 여행경비 중 몇 푼의 유로를 털어서 헤르만씨 부부에게 건네주면서, 이들이 음식물 사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며칠 후 헤르만씨 부부와 난민들로부터 마침 크리스마스시즌도 되었고 해서 “당신이 준 돈으로 우리는 함께 모여 <조병세페스티벌>을 벌였어요.” 하는 메일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몇 푼 되지도 않은 돈으로 그런 말을 듣기가 쑥스럽고 실로 민망하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내가 난민들과 함께 지내보려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졌고, 그 동안 뉴스를 통해서만 보고 듣던 난민생활의 실상을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메시지를 들어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좁은 생각일 뿐이다. 다만, 이러한 단상(斷想)이 차후 우리 후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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