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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년신사의 폴란드 여행 이야기 보따리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이 있다. 늘푸른 소나무처럼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김수용친구가 먼 길을 마다 않고 내 있는 폴란드 크라쿠프를 찾았다. 그는 뛰어난 사진작가이며 인터넷종합일간지 <시사1>의 사진기자인데, 눈만 뜨면 작품활동에 몰두해서 내가 “포토플레이보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나는 그의 폴란드 촬영가이드로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며 발가락이 몸살 나도록 9일동안 폴란드수도 바르샤바와 옛수도 크라쿠프를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녔다. 그가 떠나는 날 아침 폴란드여행 소감을 물어보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그는 한국사회가 개방적이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디지털시스템이라면, 폴란드사회는 다소 폐쇄적이고 느리지만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전에 철저를 기하는 아날로그시스템으로 느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본 폴란드는 모든 절차가 번잡한 듯 하지만 효율성보다 정확성, 편리성보다는 안전성, 사익보다는 공익을 추구하고,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역사적 인물들을 공경(恭敬)하면서 생각했던 이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의 눈에는 폴란드가 고풍스런 성당들로 가득찬 “성당천국”으로 비쳐졌다. 특히 크라쿠프의 옛 왕궁 바벨성 안에 왕족들이 예배했던 바벨대성당, 바벨성 앞의 베르나르드 디노프성당, 코로나부근의 요셉성당과 아베마리아성당, 교황 요한 바오르2세가 17년간 주교로 집전(執典)했던 성당은 수수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넋을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내가 교수로 있는 크라쿠프의 야기엘로니아대학 루차이캠퍼스는 넓은 숲과 아름다운 “작쉬벡호수”로 둘러 쌓여 있어 마치 정원도시를 연상케 한다고 놀라워했다. 작쉬벡호수는 그림보다도 아름답지만 독일 압제(壓制) 때 유대인포로들이 돌을 캐냈던 곳으로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고여 호수를 이룬 듯하여 우리의 일제(日帝)식민지 슬픔을 떠올리게 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이 호수는 때맞춘 단풍이 풍광을 더하여 수려함을 뽑냈지만, 마침 비 온 다음날 새벽에 찾은 터라 난간(欄干)도 없는 20~30미터 깎아지른 낭떠러지기 위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둘러메고 혼신의 열정을 쏟아 초점을 맞추고 무심초월(無心超越)의 세계에서 정신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그를 보면서 그의 깊은 사진세계를 곁눈질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 외에, 호수 한쪽에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볼썽사납게 쌓여 있어 세상만사는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그는 바벨성, 야기엘로니아대학과 교황 요한 바오르2세를 빼놓고는 크라쿠프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를 가슴 뭉클케 한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물게 야기엘로니아대학캠퍼스 안에 한세상을 풍미했던 저명한 교수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였다. 참으로 숙연한 광경이었지만, 세상 떠난 지 수십년,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정성껏 꽃을 갈아주는 관리인을 지켜보면서 죽어서도 존경 받는 그들이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고, 지성에 대한 권위를 보장해 주는 그런 사회시스템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이하게도 공동묘지 바로 곁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조그마한 마을이 붙어있었는데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광경이 더 없이 평화롭고 단란해 보였다.

 

우리가 폴란드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대학 앞의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동상과 천재 피아니스트 쇼팽의 심장이 기둥 속에 묻혀있는 성 크로스성당 앞 광장은 자그마하지만 아주 환상적이었다. 그 외에 검소한 모습의 대통령궁과 폴란드 최고시인 아담미츠케비츠 동상을 지난 다음 환영처럼 아름답게 나타나는 옛 왕궁의 모습과 그 앞의 드넓은 광장은 폴란드의 옛 영화(榮華)를 말해주는 듯 했다.

 

지금은 아트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스탈린이 지었다는 바르샤바역 앞의 옛 소련총독부건물은 이미 없어져버린 경복궁 안에 있었던 중앙청건물을 연상케 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바르샤바에서 한가지 안타까웠던 일은 공원 가까이 한국대사관과 일본대사관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 규모와 외양(外樣)이 비교가 안될 정도여서 왜 하필이면 일본대사관 옆에 있어서 초라하게 보이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대사관을 다른 곳으로 옮겨 좀더 웅장하게 지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폴란드여행에서 잊지 못할 추억은 10월 25일 크라쿠프 일본문화원 “망가”에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서 김수용작가와 둘이서 점심식사도 거른 채 어찔어찔할 때까지 수백명의 폴란드사람들에게 한글이름을 써줬던 행사와 이어진 나의 공개특강 때 청중들에게 친구의 사진작품을 감상케 했던 일이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크라쿠프에 한국문화원이 없기 때문에 광복70주년을 맞은 역사적 시점에서 일본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한국의 날> 행사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과 주최측의 반대로 폴란드사람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전통음악과 무용 그리고 K-Pop을 보여줄 수 없었던 점이다.

 

또 다른 추억으로는 10월 27일 야기엘로니아대학에서 나의 <한국학> 강의시간에 “한국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한 후, 역시 친구의 사진작품을 보여줬을 때 학생들의 열띤 반응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다.

 

우리가 폴란드여행을 마치며 느낀 소회(所懷)는 한국과 폴란드는 똑같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꿋꿋이 버티고 번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情)”을 느끼게 하면서 폴란드가 더욱 친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그가 폴란드를 여행하면서 힘들고 짜증났던 일은 공공장소에서 화장실을 찾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한번 이용하는데 1.5~2즈워티(약600~800원)의 돈을 내야만 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생리적인 볼일을 꼭 돈을 받아야만 하는가? 아주 화급한 경우나 돈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으로는 길거리마다 쓰레기통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울 지경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케이스는 어디 가나 무료 공중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을 찾아볼 수 없는 한국과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여기서 김수용친구와 나의 폴란드여행 이야기보따리는 그만 짐을 쌀까 한다. 나는 크라쿠프공항에서 입국장 안으로 홀홀히 사라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너무나도 많이 걸어서 아주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아쉬움과 함께 허전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마 우리 인생도 꿈처럼 왔다가 힘든 시간을 뒤로 하고 꿈처럼 사라지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폴란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에 카톡으로 내게 보낸 감동적인 메시지를 소개한다.
“말년에 들어 내 생애 가장 인상 깊었던 9일간이었네. 친구지만 태산 같은 무게로 자기를 다스리며 지켜내고 있는 존경하는 스승님의 모습을 잘 읽고, 근면하고 검소한 삶의 가르침, 여생의 좌우명으로 살라는 깊은 울림 안고 밀라노를 향한다. 친구여,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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