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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8-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

화랑들의 정신적 지주와 호국불교의 도량처

 

(시사1 = 김재필 기자) 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제 199호)

 

진달래가 산간을 점점히 선홍빛으로 물들이던 계절에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3번째로 신라인들의 불국토인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 있는 토함산(吐含山), 금강산(金剛山), 함월산(含月山), 선도산仙桃山)과 함께 신라인들이 신성시 한 경주 오악(五嶽)중의 중악(中嶽)으로 불리는 해발 827.2m 높이의 단석산(斷石山)에 위치한 신선사마애불상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 산은 경주 시내를 벗어난 건천읍과 산내면에 걸쳐 있어 삼국의 영토분쟁이 치열할 때 백제군들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청도를 거쳐 경주로 쳐들어왔던 길목으로 원래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 산에서 수련했던 곳이라 한다.

 

‘삼국사지’와 ‘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등에 의하면 가야국 김수로왕의 13대 후손인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 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목욕재계 하고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자 4일 만에 난승(難勝)이라는 한 노인이 나타나 신검(神劍)과 비법이 담긴 책을 주었다고 하며 그는 그 칼로 무술을 연마하면서 단칼에 바위를 내려치니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한다. 산정상에 그 ‘단석’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 후로부터 산 이름이 단석산으로 불리었다.

 

단석산 6부능선쯤에 위치한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는 길은 녹녹치 않았다. 산 입구 초소에서 주차를 하고 가파른 길을 40여분 올라오니 신선사에 다다른다.

 

신선사는 7세기에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한 신라의 고승 자장대사의 제자 잠주(岑珠)스님이 창건한 석굴사원으로 법화종 사찰이다.

 

사찰 앞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사찰에 대한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걸 구경하고 집에 오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수 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다.’ 는 전설을 듣고 보니 신선사(神仙寺)라는 이름이 걸맞게 들린다.

 

창건 초기엔 화랑 낭도들과 신도들로 야단에 법석을 차렸을 정도로 큰 석굴사원이었을 텐데 지금은 석굴은 작은 암자처럼 본절은 관음전을 비롯한 3채만 남아 있어 찾는이도 거의 없는듯 사찰 주위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진달래조차 을씨년스럽게 보였으나 경내를 흐르는 독경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이 어우러져진 합창은 신선들의 노래소리로 들린다.

 

관음전 오른쪽으로 나무테크위를 50여m쯤 걸어가니 마을사람들이 탱바위라 부른다는 높이 10m 길이 18m 너비 3m의 상인암(上人岩)이 ㄷ자 형태로 남, 북, 동면으로 석굴 모양처럼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작은 쪽문과 같은 틈새를 돌아 서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니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 공양인상 등 10구가 바위면에 새겨진 조각상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인 ‘국보 제199호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이 나를 압도 한다.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 마애불은 7곳이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지역의 많은(33개) 마애불중 국보로 지정된 곳은 경주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312호)’과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199호)’ 두 곳뿐이다.

 

입구 정면(동면)의 본존불에 잠시 합장하고 천천히 촬영하며 둘러 본다. 왼쪽이 북암, 오른쪽이 남암이다. 들어서자마자 북면인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안내하는 자세다. 그 밑에 있는 버선 코같은 모양의 뽀족한 절풍(삼국시대 남자들이 쓴 위가 뽀족한 관모)을 쓰고 공양을 바치는 자세의 공양인상 2기와 스님상 1구가 새겨져 있는데 나의 호기심을 발동케 한 것은 공양인상이다.

 

앞의 인물은 중생을 치유하는 성수가 담겨 있을듯한 정병인지 아니면 본존불에 차를 공양하는 찻잔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그릇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인물은 성수 채 같은 나뭇가지를 들고 있어 신라인들의 일상적인 종교 생활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공양인상도 미륵보살반가상을 포함한 4기의 불상군처럼 동면의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마애불의 일반적인 도형에서 볼 수 없었던 공양인상을 자세히 보니 앞에 선 인물보다 뒤에선 인물이 좀 작게 새겨져 원근감을 주었으며, 삼국시대의 복식으로 볼 때 주로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썻던 절풍을 쓰고 신라인들이 입었던 긴 상의에 통바지를 입은 복식이 특이하다.

 

동면에 새겨진 본존불은 8.2m 높이의 거대한 장방형의 바위에 새겨진 대형 미륵불로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서쪽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남면엔 바위에 마모가 심한 지장보살이 홀로 우뚝 서 있다. 그 아래에는 1969년 신라오악 조사단이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200자를 판독했다는 19자씩 20행으로 이루어진 약 380자의 명문이 보인다. ‘慶州上人巖造像銘記(경주상인암조상명기)’로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 라는 내용이다.

 

7세기경 신라 최초의 석굴에 조성된 마애불상군은  당시 신라왕실의 비주류였던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화랑들을 수련시키고,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강녕을 위해, 호국불교를 염원했던 백성들의 기도처였던 석굴을 나오니 한 줄기의 바람이 싸하게 머리 위를 때리며 지나간다.

오늘따라 이 바람이 1,500여년의 우리문화의 맥을 외면하지 말라는 죽비처럼 느껴지는 건 어인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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