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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훈의 詩談/47] 박인환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

 

이번 칼럼에서는 1950년대 우리나라 모더니즘 시인의 대표격인 박인환 시인의 작품인 ‘목마와 숙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박 시인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25살의 젊은 나이에 6.25 전쟁을 겪게 됐다. 전쟁 당시 그는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비며 분단국가의 비극적 참상을 목도했다. 전쟁을 겪은 한반도는 잿더미 속 폐허가 됐던 것. 박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망감과 허무에 휩싸인 시민들에게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것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해내고, 국민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버지니아 울프의 순수한 눈을 바라보며 순수함으로 돌아가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

 

내년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잠룡들간 네거티프 설전이 매우 뜨거운 모양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가 이른바 ‘백제 발언’을 놓고 충돌한 게 그렇다. 이 지사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소위 백제, 호남 이쪽이 주체가 돼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예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이 지사의 백제 발언에 대해 호남 출신 잠룡인 이 전 대표는 지난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역구도에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글을 올려 반박했다. 이 지사 측도 재반박했다. 우원식 의원은 “김대중 노무현의 정신을 훼손하는 망국적 지역주의를 이낙연 캠프가 꺼내들어 지지율 반전을 노리다니, 참으로 충격적”이라고 주장했다.

 

6.25 전쟁은 한민족이 서로 총을 겨눈 가슴 아픈 참극이다. 헌데 최근 우리나라, 좁게는 한 당에서 잠룡들끼리 서로 총을 겨눈 모습에서 조그만 6.25 전쟁이 연상돼 가슴이 아팠다. 여권의 잠룡들의 거센 신경전은 국민들에게 절대 긍정적으로 보일 리 없다. 한층 성숙한 경쟁을 선보여주길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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