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부시랑 설거정(薛居正)이 권지낭주(權知朗州)로 부임한 후, 이미 평정된 호남왕 주보권 치하에 있던 수천 명에 달하는 패잔병들이 왕단(汪端)의 통솔 하에 산속이나 호수에 밀집하여 소란을 피웠다.
하루 속히 이 비적무리를 소멸하기 위해 무장들은 낭주 전역을 몰살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설거정은 엄명을 내려 이를 저지시켰다.
후에 설거정의 계획대로 두목 왕단만 생포함으로써 비적무리의 광란을 잠재웠다.
하나는 두목만 생포하는 작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 전체를 도살하는 방법인데, 이와 같이 큰 차이를 나타낸 방법에서 문관인 설거정과 무장들의 일처리 방법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고 송태조의 정치적 결책이 얼마나 영명한가를 알 수 있다.
조광윤은 본시 살인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군주가 문신을 지주(知州)로 임명했으니, 그 지주 또한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인덕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인정치의 이로운 점이다. 송나라는 건국 초기에 두 번의 반란평정과 다섯 번의 영토 확장을 거쳐 이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신중보(辛仲甫)를 광주(光州)지주로 임명했다.
신중보는 본래 성덕(成德)절도사 곽숭(郭崇)의 참모로 있었는데 문무를 겸비한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곽숭이 절도사의 임무를 마치고 조정에 돌아올 때 그도 함께 따라왔다. 문인을 좋아하는 조광윤은 그를 조정의 우보궐(右補闕)로 임용했다.
신중보가 부임할 당시 관할지역 내 황천(潢川)에는 대홍수가 범람해 고을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홍수에 고립된 황천은 성벽이 무너지고 성안에 있는 군량미와 백성들을 위한 비축미(備蓄米)가 곧 홍수에 쓸려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수백 척의 배를 집결시키고 병력과 백성을 동원해 천신만고 끝에 군량미와 비축미를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절도사 막부에서 참모로 묵묵히 있던 신중보는 송태조 조광윤을 만나 지주로 부임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재앙의 피해를 줄이고 조광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문신을 지주로 임명하고 무관으로부터 지방행정권을 박탈한 것은 조광윤이 황제가 된 후 실시한 위대한 조치였다.
문인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성현의 인덕으로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지방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더욱 대담하게 줄곧 무장이 수비하고 있던 국경지역에도 문관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964년(태조5) 9월, 세습직이던 영무(靈武)절도사 풍계업(馮繼業)이 송태조에게 식솔을 데리고 내지(內地)로 돌아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조광윤은 이 기회에 공원외랑(功員外郞)이며 사주(泗州)지주로 있는 문관 단사공(段思恭)을 국경에 보내 시험적으로 영주(靈州)지주를 맡기려고 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단사공에게 말했다.
「풍계업은 영주의 융족(戎族)들은 그들의 족장이 지배해야 복종한다 했소. 위청(衛靑)이나 곽거병(霍去病) 같은 맹장이 가도 쫓겨날 것이라고 말하더군. 말하자면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곳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오. 그대가 해낼 수 있겠소?」
위청과 곽거병은 한(漢)나라의 명장으로 흉노(匈奴)가 끊임없이 한나라 북방의 여러 군을 침범할 때 일곱 번이나 출전해 흉노를 무찌르고 한왕조(漢王朝)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 조광윤은 무관인 풍계업의 이야기를 빌려 단사공에게 그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변방지역인 영무에서 돌아오는 절도사 풍계업은 교만해 내지(內地)에서 파견된 관리를 깔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나라 위청이나 곽거병 같은 명장보다도 더 잘났다고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짐(朕)이 험한 영무지역의 지주에 일개 문관을 염두에 두고 있느냐며, 자신 외에는 국경을 지킬 자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조광윤은 일부러 그의 분발심을 자극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단사공에게 “국경의 군사를 관리할 수 있는가? 또 국경지역인 영주(靈州)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송태조의 말을 듣고 두려울 것 없다고 생각한 단사공은 조광윤에게 굳게 다짐했다.
「신(臣)은 예의와 화목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고 도덕으로 그들을 납득시킬 것입니다. 신(臣)은 비록 위청, 곽거병과 같이 융족과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변방의 평화는 고수할 것입니다.」
단사공의 이 말을 듣고 크게 흡족해한 조광윤은 또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당나라의 이정(李靖), 곽자의(郭子儀) 등도 모두 유생 출신이지만 큰 공을 세웠소. 우리 송나라 왕조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게 될 것이오.」
이정은 당나라의 유명한 군사가로서 학문이 높았으며, 군을 이끌고 소선(蕭銑)을 정복하고, 영남 일대를 탈취한 명장이었다.
곽자의는 무과(武科) 출신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잔당인 사사명(史思明)을 격퇴시켰다. 이와 같이 이정과 곽자의 두 사람은 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공부를 많이 한 그들은 문인으로서 군에 입대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광윤은 위청과 곽거병을 논하고, 또 당나라의 이정과 곽자의 등 두 명의 문인을 언급함으로써, 문인도 국경을 지켜낼 수 있고 군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단사공을 격려했다.
단사공은 조광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무에 부임한 후 그는 풍계업의 실책들을 시정하고 전심전력으로 변방의 융족(戎族)을 위로하는 정책을 실시해 변방의 소수민족들을 안정시켰다.
변방의 곳곳을 누빈 그는 문제점들을 일일이 조정에 보고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시정할 방안을 제시했다. 조정은 그의 제안에 따라 변방 소수민족에게 유리하고 그들의 풍속과 습관에 맞는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크게 민심을 얻게 되었다.
문신 출신인 단사공은 영무에 부임한 후 무력으로 변방의 소수민족을 정복하려 하지 않고, 덕행과 인정(仁政)에 의해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전력을 다해 수수민족의 풍속과 습관을 이해하고 폐단을 제거함으로써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문인정치를 실시함에 있어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깊이 연마해 나갔다.
문인정치가 올바른 원칙이라고 깨달은 그는 진지하게 스스로 그것을 실행해나가고 동요 없이 문인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여 이 문인들이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지방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지방을 안정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문인을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사상을 순조롭게 관철해 나갈 수 있었다.
성현의 도덕, 인의를 배운 문신들은 모두 그 가르침을 원칙으로 하여 지방을 다스림으로써, 송나라 초기에 융족(戎族) 등 소수민족을 안정시켰고 역대 왕조가 해결하지 못했던 변방의 환란을 슬기롭게 다스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