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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병고치려 손가락 깨물어 피 먹인 차미리사의 처절한 삶

덕성여대 103주년, 설립자, 독립운동가 차미리사의 교육철학 눈길

덕성여대 설립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선생이 김미리사로 성을 바꿔 활동했는데,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지난 18일 덕성여대가 창학 103주년을 맞았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 덕성학원(전신 근화학원)을 설립한 독립유공자 차미리사 선생. 한 마디로 일제식민 암흑시대 3.1만세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민족사학을 창학한 분이다. 특히 교육운동과 함께 독립운동, 여성운동, 통일운동가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이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그동안 독립운동사는 남성위주, 학식위주, 직업을 가진 사람 등을 주축으로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독립운동가도 상당수 존재했다.

 

해녀, 노동운동가, 기생, 교사, 기자, 의사, 간호사, 의병 등 여타 신분을 떠아 여성들도 항일운동을 했다. 이는 여성독립운동가 조명에 혼신을 쏟은 시인 이윤옥 문학박사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1~10>,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등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기록은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 2>에 수록돼 있다. 덕성여대 총장 직무대행을 역임한 한상권 교수가 2009년 펴낸 <차미리사 전집1~2>에서 그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특히 이윤옥 시인의 2집 시집에는 역사학자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안성기생 변매화, 빗창으로 일본 도지사 혼낸 제주 해녀 부춘화,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 안산 샘골 처녀 선생 최용신 등과 함께 조선 여성을 무지 속에 해방한 차미리사(車美理士, 1880.8.21.~1955.6.1) 여사를 소개하고 있다. 물론 덕성여대 자료에 의하면 그의 출생일이 1879년으로 표기돼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당시 배화여학교 사감으로 있을 때의 그의 발언이다.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 내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잘살 것이 아닌가.”

 

차미리사는 국권회복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의 독립이 되려면 여성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권신장과 양성평등을 위해 헌신했다. 조선여자교육회를 세워 조선 최초의 여성야학을 시작했다. 청각장애인으로서 이를 극복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특히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하고 소외된 가정부인들을 교육한 사회운동가였다.

 

1928년 2월 1일자 발행한 잡지 <별건곤> 제11호에는 차미리사의 글 ‘춘풍춘우(春風秋雨) 50년간에 다루다한(多淚多恨)한 나의 역사’가 실렸다. 즉 ‘봄바람 가을비 50년 눈물의 세월 회고기’였다. 그의 글을 발췌해 소개해 본다.

 

현재는 ‘뜻이 잘 맞아 서로를 잘 도와 주는 화목한 부부관계’을 일컫는 말이지만, 당시 ‘아내는 반드시 남편(男便)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의미의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엄격한 유교적 습관에 의지해, 연안 차씨인 자신의 본성을 떼고, 남편인 김씨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로 활동을 했다. 하지만 금전상 거래나 증명문서 등에는 차미리사로 명시했다고. 특히 서양이나 일본에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랐는데 예수교회에 들어가면서 교회 습관에 의해 차씨로 행세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는 고양군 공덕리(지금의 서울 공덕동) 출생이다. 17살이 되던 봄에 김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19살의 나이에 딸 하나만을 남기고 남편이 사망한다.

 

“열일곱 살 되든 봄에 그 근동의 김씨 집으로 출가하였는데, 3년이 채 되기도 전에 전생의 악연이라 할지, 이생의 박명이라할지, 남편되는 김씨는 불행이 병으로 신음하다가 백약이 무효하고 최후에는 내가 단지(斷指)까지 하였으나 또한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그는 영원히 천당의 길로 갔다.”

 

단지(斷指)란 말은 ‘손가락을 자른다’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남편의 병이 위중해,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먹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눈물 겨운 고독한 생활을 이어 간다. 그 때 남편을 잃은 고모가 함께 살았다. 고모는 천주교를 다니다가 개종해 북감리교파인 상동예배당을 다녔는데, 차미리사의 고독함을 불쌍히 여겨 하늘님을 권유해 사랑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다닐 때 여러 사람들과 선각자들이 미국 유학을 권유해 애가 탔고 열정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 고민했다. 마침 어떤 이의 소개로 서양 선교사 헐버트를 알게 됐다. 헐버트는 뜻을 가상히 여겨 중국소주교회에 있는 고 목사라는 분을 소개해 중국으로 가게 됐다. 딸의 나이는 6살.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70세가 넘은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없는 여섯 살 먹은 어린 딸을 버리고 산설고 물설은 외국으로 가는 것이 참아 인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유학열이 가슴에 탱중한 나는 그것도 저것도 다 잊어 버리고, 다만 교회 와 조신성씨(趙信聖氏)에게 집의 일을 부탁하고 중국 소주로 향했다.”

 

중국 소주에서 신학교에 입학해 4년간 신학공부를 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까닭인지 이역풍토에 와 고생을 너무 한 까닭인지 위험한 상태인 뇌신경병에 결려 여러 달을 신음했다고 그는 술회했다.

 

이로 인한 청각장애로 인해 신문이나 잡지 기자의 조롱을 이따금 받게 되기도 했다. 그 후 교회 일로 미국에 가 약 9년 동안 다시 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공부보다도 사회 활동에 정성을 쏟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 13도를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동지들을 많이 모아 뭔가의 사업을 생각했다. 하지만 교회의 부탁을 받고 10년 여 배화여학교 교편을 잡게 됐다.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배화여학교를 그만두고, 구가정 부인들 모아 새문안 염정동 예배당 지하실에서 부인야학을 진행했다.

 

바로 오늘날 근화여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해 서울과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순회강연, 소인극도 했다. 당시 청진동에 있는 조선여자교육협회 소가옥은 서양 사람의 돈이나 외국 사람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순전히 우리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으로 생긴 것이라고 그는 밝힌다.

 

생전 당시 여성운동가들이 부인해방, 가정개량을 부르짖을 때도,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밥도 찾기 전에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직업 교육이라고 강조했었다.

 

특히 차미리사 선생의 생전 교육철학인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는 그의 처절한 삶에서 깨달은 교훈이었다는 점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1879년 8월 22일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서 태어나 1955년 6월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정부는 독립운동유공자 인정해 2002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현재 덕성여대가 훤히 보이는 후문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덕성여대 후학들의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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