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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자웅을 겨눈 G2 국가 중국, 제대로 알자

[서평] 이동연 작가의 '사상사로 본 중국왕조사'

중국은 어떤 나라이며 중국인은 누구일까.

 

미국과 경쟁하며 G2로 부상한 중국, 중화사상의 원천을, 첫 왕조부터 연대기적 사상사로 푼 책이 나왔다.

 

이동연 작가의 <사상사로 본 중국왕조사>(2022년 11월, 창해)는 중국의 오천년 역사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한 나라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그 동인을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족이 모여 산 황하 유역에서 출발한 오천년 왕조 역사는 수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하지만 작은 회오리가 커져 동심원을 그리듯, 그 추동의 힘이 중화사상이었다. 중화사상의 기반은 춘추전국시대의 유교와 도교이다. 여기에 한나라 때 들어온 불교가 가세해 유불선(儒佛仙)이라는 고유 명칭이 동양사상을 상징하게 됐다. 유불선적 동양의 사유는 정신과 물체,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서양적 사유와 달리, 하늘과 땅이 합하여 만물이 생기고 음양이 만나 변화를 일으킨다고 봤다.

 

중국 왕조의 특징은 정치와 사상이 함께 했다. 왕조는 황제를 정점으로 거대한 가족처럼 형성됐고 이 구조는 무너져도 곧 복원됐다. 정치와 함께 했던 유가와 도가 사상은 기반이 다르지만 함께 공존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황하유역에서 출발한 유가는 사대부 등 지배층 중심으로 전개되며 동양인의 집단 무의식에 도가, 집단 초의식에 유가 자립를 잡았다. 유가의 성인은 인륜의 극치를 이룬사람이고 도가의 성인은 무위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이렇게 유가와 도가가 싸우지 않고 동양사상을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정반합을 믿는 주역의 이치 때문에 서로 융합하면서 고유 관점을 유지한 것이라고.

 

중국은 서양의 신화 처럼, 신화라는 개념대신, 인격 중심의 전설로만이 전해졌다. 첫 국가의 형태로 최초로 등장한 왕조가 하나라(BC 2070~BC1600)이다.  첫 임금 우는 천하를 위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임금이 낙수에서 치수를 하다 큰 거북의 등에 묘한 그림이 있는 것을 보고,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까지 원칙을 세웠다. 바로 홍범구주(洪範九疇)였다. 홍은 크다를, 범은 법을, 구주는 아홉가지를 의미한다. 9개의 큰법, 즉 헌법이었다.

 

오행(우주 원리), 오사(윤리의 기본), 팔정(행정에 관한 사항), 오기(계절의 순환원리), 왕도(황극, 탕평책), 삼덕(통치원리), 계의(점치는 것, 샤머니즘), 서징(날씨나 기온, 자연현상), 오복(장수, 부요, 건강, 덕, 편안한 죽음)과 육극(요절, 질병, 우환, 가난, 사약, 허약) 등 9가지이다.

 

  홍범구주는 중국 문화의 기본코드가 됐다. 특히 차후 중국 고대제국의 통치이념은 물론 사상의 기초가 됐다는 점이다. 우임금에서 비롯돼 상나라를 거쳐 주나라 말기인 전국시대까지 1200년 이상 이어지면서 각 항목에 구체적인 덕목이 부가됐다. 하나라 마지막 17대 걸왕의 폭정으로 곤오씨 부족에 이어 왕족 탕의 역성혁명(반란)으로 470여년간 이어온 하나라가 무너진다.

 

새 왕조인 상나라 탕왕이 등장한다. 상나라는 왕 이름 뒤에 태어난 말의 일간이 들어가는데, 간지(干支)이다. 간지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이 결합하면서 하늘의 태양인 십간은 양이 되고, 땅의 동물인 십이지는 음으로 분류한다.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하면 전부 60개가 나온다. 이를 육십갑자(六十甲子)라고 해 연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10대 중정왕 이후 계승문제로 9대에 걸친 숙질, 형제간의 내분이 시작됐다. 22대 무정이 등장하면서 태평성대를 연다. 마지막 30대 주왕때 7년간 옥에 갇힌 희창이 석방돼 죽고 아들 희발(주나라 무왕)이 강태공과 함께 상나라 정복에 나설때 고죽국 제후의 두 아들 백이와 숙제가 찾아와 '아직 부친이 상중인데 전쟁을 하신다면 효가 아니다, 또한 제후가 군주를 치는 것은 인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희발이 이들을 죽이려하자, 강태공이 '의로운 사람들'이라며 말리고 돌려보낸 일화가 전해진다.

 

상나라를 무너뜨린 희발, 무왕이 시작한 주나라는 제자백가의 나라였다. 하지만 300년은 서주시대였고, 이후 500년은 동주시대에서는 제후들이 각각 독립국가를 지향하면서 다시 춘추시대(BC 770~BC 403)와 전국시대(BC403~BC221)가 된다. 춘추 말기부터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사회적 가치를 세워 해결해보려고 제자백가가 출현한다. 

 

여러 학자라는 의미의 '제자(諸子)'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하는 '백가(百家)'가 합쳐져 제자백가라고 한다.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친 것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이다. 즉 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인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

 

노자이후 300년 가량 전개된 제자백가의 지적 향연은 중국은 물론 동양식 사고의 준거로 남았다. 그 후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54개 나라, 560여 명의 군주가 명멸하면서도 이 프레임이 그대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주나라 이후 등장한 진나라는 음양오행적 사고와 법가적 통치를 기반으로 삼았다. 이사가 법가의 논리에 따라 고래의 제도를 거침없이 개혁했다. 유가의 반발이 심했다. 진왕국의 역사서와 의약, 점술, 농업 등 실용서를 제외한 나머지 6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시경과 서경 등 제자백가 서적을 모아 불태웠고, 유학자 460명을 매장했다. 바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분서갱유'였다. 다행히 몰수서적 중 일부는 연구용으로 황궁 서고에 보관해 후세에 알려지게 됐다. 분서갱유와 함께 책을 옆구리에 끼지 못하도록 한 협서금법을 제정했다.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천록비결>이란 책을 해석하지 못하고 딱 한구절 만 해석 했는데 '망진자호야('亡秦者湖也)란 문구였다. '오랑캐가 진나라를 멸망시킨다는 의미'였고, 이를 그대로 믿고 30만 군사와 함께 장군 몽염을 보내 흉노를 공격하고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진나라 말의 유방의 친화력과 향우의 두뇌가 엿보인다. 향우는 명석한 두뇌를 타고났으며 좋은 가문, 다양한 학습기회 등을 누린 반면, 유방은 천하의 무뢰배 노릇하며 현장에서 직감적으로 사람을 다루는법을 체득했다. 초한 전쟁은 지능지수가 탁월한 항우와 사회지수가 탁월한 유방의 대결로, 유방이 향우보다 개인 역량, 사회 조건 등이 뒤졌지만 중국 최초로 서민출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임협 집단에서 익힌 용인술과 기풍으로 약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유방이 한나라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이후 426년간 존속된다. 중간쯤 반기를 든 와망의 신나라를 기점으로 이전을 '전한' 이후를 '후한'이라고 부른다. 유방은 즉위 후 전란에 지칠대로 지친 백성에게 휴식을 주는 여민 휴식과 중앙집권화롤 꾀한다. 후한 초대 왕 광무제는 왕망이 호족의 억압을 실패요인으로 보고 이후 후대까지 호족과 손을 잡고 200년의 호족 시대를 연다.

 

이 시대가 바로 삼국지에 나온 위촉오 시대이다. 중원을 차지한 조조(위)와 강동에 자리잡은 손권,(오)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유비(촉). 207년 융중에 은거하던 제갈공명이 유비를 만나 밝힌 천하삼분지계론은 중국을 셋으로 나누어 유비가 하나를 차지해야 혼돈에 빠진 사람들의 뇌리에 잘 각인 돼, 이를 기반으로 천하통일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촉나라는 263년 사마중달의 아들 사마소가 실권을 잡은 위나라에게 흡수당했고, 사마소에 이어 아들 사마염이 진왕이 돼 진나라를 열고 초대 무제가 됐다. 진나라의 역사에서 이를 '서진'이라고 한다. 서진이 280년 오나라를 점령해 삼국시대를 마무리한다. 삼국시대 학자 왕필과 하안은 도가를 깊이 연구해 도가관점의 유교경전을 제해석했다. 이들이 보는 노자와 공자는 유(有)의 세계에 살았다고 해석했다. 다만 노자는 무를 지향했고 공자는 무가 체화된 성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북조 사회는 귀족문화가 융성했다. 절에서 네번이나 노예로 일해 황제제보살을 자처한 양무제가 불교경전을 중시하고 이론에 정통했다면, 달마는 경전보다 선의 경지를 중시했다. 달마대사의 안심 법문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을 따르지만 깨달으면 법이 사람을 따른다. 깨달으면 의식이 물질을 다스리고 어리석으면 물질이 의식을 다스린다." 

 

'인생이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꽃잎과 같아서, 어떤 꽃은 금방석에 떨어지고 어떤 꽃은 변소에 떨어지듯 귀천이 나뉘는데, 인과가 어디 있겠는가' 범진이 인과를 불신하는 신멸론(神滅論)의 내용이다. 양무제는 <신멸론> 읽고 승려와 범진을 불러 토론을 했다. 이날  범진이 밝힌 형신상즉론(刑神相卽論)이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의존한다. 육체가 있어야 영혼이 존재하고 육체가 소멸하면 영혼도 소멸한다.  따라서 영혼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불멸의 주체가 없으니 윤회도 없다." 

 

양무제는 범진을 인정하는 한편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면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여 <칙답신하신멸론>을 집필했다. 또한 불교 교리가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승려가 존중받아야 한다며, 술과 고기를 금하는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표했다.

 

수나라를 개국해 24년의 치세를 평가한  문제 양견을 두고 '개황(開皇)의 치'라고 부른다.  흔히 중국의 최고 태평성대를, 당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라고 하는데, 문제가 축적해 놓은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점이다. 문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598년 고구려 기병대가 요서지방을 침략했고, 문제가 조공을 요구해도 무시했다. 수나라 30만 대군이 고구려를 총공격에 나섰다. 금세 정복하리라 믿었지만 풍랑, 홍수, 고구려 기병대 전략 등으로 고구려 땅을 밟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이 때 수나라 병사 80%가 죽었다. 문제는 고구려 원정 계획을 중단하고 다시 내치에 관심을 기울인다. 양제가 등극하면서 대운하가 마무리 되자, 고구려 원정 조서를 내리고 병사 113만을 집결시켜, 612년 고구려을 향한다. 하지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양제는 3차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지만 1~2차 때와 달리 징병도 힘들고 진격 중 도주한 자가 많아 결국 부상자만 속출했다. 수나라가 패배를 거듭하자 절망한 수나라 장군 우문화급이 수건으로 수양제의 목을 졸라 질식사를 시킨다.

 

장안을 점거한 이연이 양제의 손자 공세를 황제로 내세웠다가 곧바로 선양을 받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고조 이연에서 아들 이세민(태종)이 즉위해 정치를 탁월하게 해 '정관의 치'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돌궐의 왕비 소황후를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다, 그는 남조 양명제의 딸로 수황제의 황비였다. 남북조부터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까지 6명의 군주가 소왕후를 스쳤다. 소왕후는 당대 동북아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태종은 임종시 아들 고종의 유약함을 알고 걱정하면서 '다시는고구려와 전쟁에 휘말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고종이 심약해지자 태종의 궁녀 측천무후가 부상한다. 그녀 이름은 무조(625~705), 열네살에 궁녀가 되었으나 태종이 죽자 도교 사원 감업사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일찍이 무조를 마음에 품은 고종이 즉위 후 환속시켜 궁중에 데려와 끝내 무조를 황후로 삼았다. 심약해진 고종의 이면에서 측천무후가 전권을 휘둘렀다. 660년 신라의 요청으로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백제를 점령하고 668년에는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를 정벌했다. 690년 아들 예종을 폐위하고 친히 황제가 된다. 권력욕대로 혈연 중심의 공고한 가부장 구조를 그는 농락했다.

 

역대 남자 황제들이 후궁을 두었듯이 측천무후도 3천여명의 남총을 두었다. 통치한 50년 동안  당나라 관례를 완전이 벗어난 바람에 지배층 내부에서 격렬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백성의 삶은 더 좋아져서 '정관의 치'에 이어 '무주의 치'라고 평가받았다. 국방도 상대적으로 강해져 당 태종이 포기한 고구려까지 정벌할 수 있었다. 82세가 되는 705년 기력을 잃고 눕는다. 후반에 혼탁해졌지만 현종의 치세는 전반기는 '개원의 치'라 부를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다. 후반기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밤새 즐기느라 다음 날 조회를 주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당나라의 가치관은 '오경 정의'였다.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등 오경의 해석이 제각각이었는데 이를 통합한 것이 오경정의였다.

 

당나라 이후 5대 10국시대는 15왕조 모두 군벌이 세운나라였다. 당말 이후 절대 강자가 없어 절도사들이 상호 견제 속에 흥망이 거듭 교체된 시기였다. 이 시기 단명 왕조가 많았다. 이런 미증유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대대로 내려왔던 문벌 귀족이 완전히 몰락했다. 이 시기 왕조가 바뀌어도 풍조라는 사람은 중용했다. 정권교체기마다 풍조의 처신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말조심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당시 백성들에게 관후한 재상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뉘면 합쳐지고 합치면 다시 나눠지는 이치대로 한나라가 위진남북조로 나뉘고 당나라로 합쳐다가 다시 5대 10국으로 나뉘더니 송나라로 합쳐졌다. 5대 10국시대 혼돈으로부터 반동으로 송나라의 도덕주의(주자학)가 동아시아의 준칙으로 남았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주자학의 기반을 조성한다. 그 대안이 군벌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문치주의를 신봉한다. 자국민 노예제도도 폐지한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귄리를 누렸으며 사농공상이란 직능별 구분을 두되, 신분에 관계없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런 송나라의 도덕주의 극점에 관념론의 최고봉인 주자의 성리학있었다. 주자는 유교의 가치론과 도교의 우주론과 불교의 심성론을 보완해 성리학의 기반을 삼았다. 권모술수에 능한 한탁주가 황태후와 황후를 이용해 주자를 내쫓았다 "마술을 부려 후진을 미혹시켰다'라는 죄목이었다. 한마디로 마녀사냥으로 주자를 내몰았다.

 

몽골의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차지했고, 1216년 동방 북부를 점령했다. 대규모 서역 원정을 성공리 마치고 귀국길에 서하를 공격했다. 이때가 1227년 8월이었고 진중에서 칭기스칸이 서하를 멸정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이후 후세들이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바그다드 등을 정복하는 한편, 송나라와 45년간의 전쟁을 했다. 

 

1271년 세조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을 원나라라고 칭하고 연경에 도읍지를 정했다. 원나라는 라마교와 명리학을 신봉했다. 몽골의 전통 유지와 중국식 행정체제를 따랐고, 주역 중심의 유가사상을 섬겼다. 세조 제위 35년은 원나라가 최고 전성기를 찍고,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마지막 황제 혜종까지 26년간 쉬지 않고 황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몽골 지배층에 대한 한인들의 민족적 반감이 고조될수록 원 황실은 라마교에 더 깊이 빠졌다. 나라 재정의 65% 이상을 보시하면서 정신적 피난처로 삼았다. 이때  주역에서 철학적 요소를 축소하고 인간의 사주팔자를 해석한 명리학이 크게 발전했다. 이때 명리학이 고려 등 주변 동아시아국가로 번져 나갔다.

 

남송 초기 승려 모자원이 백련종을 만들고 붉은 두건을 쓰고 봉기하며 홍건적 난을 일으킨다. 탁발승 주원장(1328~1398)도 홍건적 곽자홍 군단에 가담한다. 주원장은 장량, 제갈량 등과 함께 중국의 3대 책사로 불리는 명리학의 대가 유기를 영입해, 주원장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계략을 냈다. 홍건적 세력은 대북벌을 개시해 초반 승리 했으나, 내부갈등으로 원나라의 반격을 받고 근거지를 상실해 요동으로 쫓겨났다. 이들이 고려를 두 차례 침락했으나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괴멸당했다. 주원장은 도교 성향인 홍건족이란 이름을 버리고 유교주의를 채택해 강남 한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1368년 남경에 명나라를 건국하고 홍무제로 즉위해 북벌을 단행, 북경의 몽골인들을 북쪽 몽골 고원으로 쫓아냈다.

 

주원장 홍무제는 측근에게는 폭군이었으나 백성에게는 명군이었다. 몽골인을 축출하고 한족의 전통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자신이 신봉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명나라는 국민교육헌장처럼 된 주자학이 일색이 되면서 어떤 사상의 논쟁도 소멸됐다. 홍무제는 통치말년에 이르러 주자의 가르침을 육유(六諭)로 요약해 반포했다. 

 

부모를 잘 섬긴다, 어른을 받든다, 고향 사람과 잘 지낸다, 자식을 잘 기른다, 각각 자기 삶에 힘쓴다,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다 등 육유는 명나라의 국민교육헌장이 되었다. 

 

내각을 만든 홍희제가 8개월 만에 단명하고 선덕제가 즉위한다, 이때 부터 권력의 두 축은 내각과 환관이었다. 환관이 황제의 문서 전달과정을 이용해 내각과 더불어 권력의 한축으로 등장했다. 만력제가 내각책임자로 장거장을 임명하고 명나라 최고 재상답게 차근차근 국정을 쇄신해 나갔는데, 기득권 침해 조정 세력과 지방향신세력의 불만을 꿋꿋이 버티다가 집권 10년째 과로사를 했다 이 때부터 조정의 파벌싸움이 일어났고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참전해 나라 재정까지 파탄 났다.

 

 양명학이 풍미하며 많은 사람들이 양명학의 제자가 됐다. 그중 이슬람교도인 하남성 관리 이탁오(1527~1602)가 유달리 주목받았다. 그는 62세까지 25년간 가족과 동생 7명의 부양을 마쳤다. 이렇게 유교 윤리를 지켰다. 이후 삭발을 하고 친구인 신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회 모순을 풍자하는 기행을 벌였다. '오십 이전에 나는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나도 따라 짖었다' 공자왈 맹자왈 노자왈 장자왈 등 어떤 성인이 무슨 말을 했더라며 앵무새처럼 되뇌고 살아온 이탁오 자신을 반성한 말이었다. 주체적 반성 없는 추종자의 삶을 개 짖는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도리를 앞세운 지식인들을 이렇게 보았다.

 

"자신들의 위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도리를 이용해 혹세무민하고 있다. 세상을 초월하는 천리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여 자신을 기만할뿐더러 백성의 욕구와 의지를 억제시키며 자신들의 사욕을 채운다. 한마디로 군자연하면서 명예와 부를 다 누린다."

 

그는 명나라의 이념인 공자와 주자의 권위도 부정하면서 차라리 수호지를 읽으라고 했다. 바로 그의 지향점은 동심(童心)이었다.

 

"동심은 사회 제도, 관습, 지식, 도덕 등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첫 마음이라 지극히 순수하다. 첫 마음을 잃으면 참된 마음을 잃는 것이고 참된 나, 즉 진심을 상실한 것이다, 동심 앞에 공맹도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이탁오가 동양사회 심리의 최고봉인 유고, 특히 관화학된 공맹의 허구성을 지적한지 300년 뒤, 니체도 서양 사회 심리의 최고봉인 형이상학적 신의 존재론적 허구성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이원론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면 해체를 선언했다.

 

"플라톤 이후 모든 철학, 모든 종교는 헛수교였다.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고 다만 해석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지 해석에 불과한 환영 위에 세워진 종교나 도덕을 주장하고, 절대자 신을 상실해야만 본래적 도덕에 이를 수 있다." 이탁오의 동심과 일맥상통한 말이다.

 

고귀한 인간성이란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다. 사회적 신분이나 체면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를 긍정하며 스스로 충만해야 힘의 감정이 넘쳐 나온다는 점이다.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인 영원회귀는 어디에 있는가. 사회 통념에 매이지 않을 때, 기존의 인습화된 낡은 기억을 망각할 때, 그래서 빈자리가 있는 그곳에, 그렇게 운명지어진 자기 삶 자체를 사랑할 때, 바로 그곳에 있다. 비우면 채우고, 다시 채우고, 또 채우는 바로 그곳에 영원회귀가 있다. 따라서 삶과 죽음은 모순이 아니다. 니체의 영원회구를 보면 마치 원시 도가의 사유를 보는 느낌이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를 근대 유럽사회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했듯이 이탁오도 명나라 사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이탁오는 기꺼이 이단을 자처했다. 이러한 태도가 수많은 적을 만들어 투옥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본명은 이지(1527~1602), 소속은 양명학 좌파, 대표 저서로 분서(焚書)가 있다.

 

여러 농민군 중 역관과 전직 병사들을 모은 이자성(1606~1645) 집단이 화북지역을 잠식하고 1644년 북경을 함락한다. 이로써 명나라 277년 역사가 종지부를 찍는다.

 

여진족 후금이 1636년 청나라(누르아치 아들 태종 때)로 바뀌었고 누르하치가 태조 천명제(1616~1626)가 되었다. 청나라는 정통 주자학의 수호를 내걸고 중화 계승을 자임했다. 하지만 도교는 방치됐다.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국호를 청나라로 정하고 같은해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 여세를 중국으로 돌려 하북과 산동을 휩쓸었다.

 

청나라 강희제의 재위기간은 61년으로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길었다. 강희제가 등용한 유학자들은 순자의 예(禮)를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야 말로 자기 감정과 타인의 상호 작용을 조절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덕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청초 3대 사상가로 불린 고염무, 홍종희, 왕부지 등은  반청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정계진출을 거부하고 은거한 채 명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성찰했다.

 

전성기가 150년가량 이어지다보니 어느덧 관료사회가 부패해지고 있었다. 견륭제 때 이미 나타난 청나라 하락 징조는 견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 인종 가경계 때 현실로 나타난다. 즉위 1년 만에 터진 백련교의 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관료의 부정부패와 팔기군의 허약한 실체가 드러나 구가해 온 평화가 깨졌다.

 

영국과의 2년간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영국에 유리한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8대 선종 도광제를 이은 함풍제 때도 외우내환이 이어졌다.  즉위한 해에 서구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2년 만인 1855년 태평군은 패했지만, 1856년 공동항에 애로호 사건이 발생한다. 청나라가 애로호 선원을 해적 혐의로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건을 기회로 제2의 아편전쟁(1856~1860)을 일으킨다. 1858년 천진조약이 채결돼 10개 항구 개방과 기독교 선교의 자유보장 등을 담았다. 청나라가 천진조약 파기를 요구하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북경을 공격해 러시아의 중재로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배상금 지불은 물론 외국 사절 북경 주재권 인정, 러시아 연해주 할양 등 천진조약보다 더 불리한 북경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함풍제가 서거하고 외아들 여섯살 짜리 목종 동치제가 즉위해 서태후(1835~1908)가 막후통지를 시작한다. 이 시기 태평천국의 난 때 공을 세운 한인 이홍장이 청 조정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동치제의 사촌 네 살짜리에 불과한 덕종 광서제가 즉위했을 때도 서태후의 시대는 여전했다. 광서제는 서태후 간섭에 신물이나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을 지지했다. 서태후가 위안스카이의 도움을 받아 광서제를 연금하고 모든 정사를 맡았다. 광서제와 강유위의 유신인 변법자강운동은 103일 만에 끝이 났다.

 

이 때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려는 단체가 속속 결성되고, 그중 손문(1866~1925)은 민족, 민권, 민생 등 삼민주의를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시도해다가 실패한다. 손문은 일본,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면서 혁명 동참을 호소했다. 1907년 중국에 들어와 1908년까지 여섯 차례나 무장봉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광서제가 유폐된 채 눈을 감자, 서태후는 광서제의 세살짜리 조카 '푸이'를 옹립한다. 그 다음날 48년의 막후 통치자 서태후가 숨을 거둔다. 위안스카이가 독살했다는 설도 나돈다. 선통제 푸이의 친부 재풍이 섭정을 해 위안스카이는 물러났지만, 1911년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을 계기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며 다시 군권을 장악한다. 손문의 혁명군은 오합지졸인데다가 군자금도 부족했지만 민심이 워낙 크게 지지를 하고 있어 그 열기로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세우고 남경에서 임시 총동으로 취임했다.

 

손문은 청조 멸망과 공화국제를 요구했고, 청 마지막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는 새 정부의 대총동을 요구했다. 양측의 타협이 이루워져 위안스카이의 압력으로 1912년 2월 12일 청나라 마지막 왕 푸이가 퇴위한다.

 

저자 이동연은 소설 <삼별초>를 썼다. <소설 손자병법>과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을 그림과 함께 보는 <그림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를 곧 출판한다. 저서로 <심리학으로 들여다 본 그리스 로마 신화> <심리학으로 보는 고려왕조실록>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명작 뒤에 숨겨진 사랑>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 <이기는 리더십 10> <행복한 수면법> <그래, 한 박자 느리면 어때> <명작으로 읽는 통섭 한국사> < 365일 니체> <CEO형 인재><대화의 연금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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