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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28- 원주 흥양리 마애여래좌상

치악산을 찾는 여행자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

 

(시사1 = 김재필 기자) 2022 임인년 춘분날이다. 기상예보에 의하면 3일전에 강릉, 원주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가운데 적설량이 10~30센티 정도 많은 눈이 내렸단다.

 

그러나 한 달전부터 답사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눈소식에도 아랑곳 없이 집을 나섰다. 내가 치악산을 처음 찾은 때는 일기장에 의하면 1974년 이었으니까 48년전이다. 학창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 친구 3인방은 의기투합하여 3일 예정으로 원주시 금대리에서 출발하여 영원사 상원사 남대봉 향로봉을 거쳐 가장 높은 비로봉까지 등정하고 하산 길로 입석대를 거쳐 다시 비로봉으로 올라 와 세렴폭포를 거쳐 구룡사쪽으로 하산하는 계획이었다..

 

당시엔 지원탐방센터나 등산 지도도 제대로 갖춘 것이 없어 나침판 하나로 소로로 난길을 쭉 따라가며 가는게 전부였으며 해지면 개울 근처에 텐트 치고 숙박하곤 다음 날 일어나 계속 걷다 보니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간식거리라고는 당시 인기 있었던 새우깡(1971년에 생산 시작함)으로 입 놀림을 해 가며 유람하듯 하였으니 3일에 걸쳐 하산을 하고 서울에 도착하니 나라안이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8.15 광복절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제일교포인 문세광으로부터 피살되었던 것이다.

 

이런 옛 추억을 떠 올리며 운전을 하다보니 어느새 원주 톨게이트에 다다른다. 원주의 원조 엿인 황골엿이 유명하다는 황골마을 지나 활골탐방지원센타에 도착하니 더 이상 차는 진입을 못하게 통제한다.

 

이 길은 입석사를 경유하여 비로봉을 가장 짧은 거리로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이다. 더구나 엊그제 내린 폭설로 소나무가 넘어져 길 위에 걸쳐 차가 통행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난감해 있는데 SUV 차 한 대가 멈춰서며 차안의 사람이 공사관계자들과 이야기 나누있다. 직감적으로 입석사에 계시는 스님 같아 보여 염치를 무릎쓰고 합승을 부탁 드려본다.

 

선선히 차에 올라타라고 하시기에 탑승을 하고 편하게 입석사에 도착하니 이 곳엔 눈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쌓여 있다. 감사의 예를 표하며 명함으로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받아보니 주지로 계시는 성묵 스님이셨다. 입석사에 주석 하신지 14년 되었다는 스님도 내가 마애불 답사를 다닌다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본래 입석사는 입석대(立石臺)로부터 원주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암자가 있던 것을 뒤에 현재 입석사 옆의 구지(舊址)로 옮겼다가 최근에 다시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원주시 홈페이지 관광지도에도 나오지 않는(인터넷에서 원주 관광지도를 검색 해 보니) 작은 절이지만 경내를 둘러 보니 경사진 좁은 지형이라서 건물들은 계단식으로 3단에 걸쳐 지어졌다.

 

맨 아래 지면엔 1957년에 지은 요사채(내가 치악산을 처음 오른 1974년엔 바로 이 건물 한 채만 초라하게 있었다), 그 위 지면엔 1992년 정면 3칸 측면 규모의 팔작지붕집인 대웅전, 다시 그 위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 지붕집인 삼성각이 있다.

 

이렇듯 계단식으로 지어진 3채만으로 이루어진 입석사는 단촐하나 정갈하고 수려하다. 전하는 바로는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이 곳 토굴에서 수도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조선 중기 인헌왕후의 부친인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이 저술한 『팔곡집(八谷集)』의 시문에 이 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입석대는 원주의 동쪽 20리에 치악산 위에 있는데, ···(중략)··· 이른바 입석이라는 이름은 그 아래 정사가 있어 또한 입석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立石臺在州東二十里雉嶽山上 ···(중략)··· 所謂立石者也 其下有精舍 亦以立石爲名) ”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입석사가 조선 중기에도 사세의 명맥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어떤 연유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과 역시 같은 시대에 조각된 입석대 근처 암벽의 마애불좌상으로 인해 오랜 연혁을 지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천년 고찰이다.

 

마애불 찾아가는 길은 요사채와 대웅전 사이의 계단으로 올라 간다. 봄눈이 이제 녹기 시작하는지 밟을 때마다 부드럽게 느껴지는 감촉과 뽀드득 거리는 소리도 오랜만에 들어 본다. 신선대를 지나니 왼쪽에 입석대가 보인다.

 

그곳으로부터 10센티 이상 쌓인 눈길을 20여미터 정도 걸으니 오른쪽 버덩에 높이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삼각형의 바위가 작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암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 데 비교적 매끌한 앞면 암벽을 다듬지도 않은 채 돋을 새김으로 조성된 마애불좌상이 복련의 대좌 위에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섬강 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듯 남쪽을 향해 은자(隱者)처럼 앉아 있다. 연화대좌와 광배(光背)를 포함한 높이가 117cm이지만 대좌하단의 구획선에서 두광까지는 141cm, 불신만의 높이는 62cm로, 당시 석공은 은둔 하던 사람 크기의 부처를 바위에서 불러 모셨던 것 같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상투구술로 중심계주가 장식되어 있으며, 감은 듯 아래를 내려보고 있는 눈, 마모는 되었지만 긴 코, 아르카이크(그리스의 아르카이크 조각의 입 주위에 나타나는 미소와 유사한 표정)한 미소를 띄고 있는 입과 얼굴에 비해 긴 귀 등이 상호 전체적으로 볼 때 비례가 좋은 풍만한 모습으로 목의 삼도는 생략 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어깨에 걸친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형식적으로 흐르는 간략화 된 주름이 두껍게 표현 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수인을 하고 있으며, 오른발은 위로 왼발은 아래로 길상좌의 자세인 결가부좌로 무릎 폭이 비교적 넓게 표현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불신 전체를 감싸는 원형의 두광과 타원형의 신광은 따로 장식없이 단순하게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대좌 오른쪽 아래에 <원우5년경오3월일(元祐五年庚午三月日)>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는 데 마모가 너무 심해 판독하기가 어려웠다.

원우는 북송 철종의 연호이고 원우5년 경오년은 우리나라에선 고려 선종 7년(1090)년이다. 따라서 이 명문으로 볼 때 이 마애불은 고려전기인 11세기에 조성 되었음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하겠다. 강원도에는 6기의 마애불상이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는데 4기가 원주지방에 몰려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원주시는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반도의 백두대간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원주시를 둘러싼 지역으로는 동쪽의 영월·평창군, 서쪽의 경기도 여주시·양평군, 북쪽의 횡성군, 남쪽의 충청북도 충주·제천시 등이 있다. 특히, 원주시는 남한강과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과 운계천을 경계로 충청북도 충주시 등 2개의 다른 도와 접하고 있는 위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이동하는 교통로로 치악산이라는 높은 산에 대한 경외감 및 여행길에서의 무사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신앙의 대상으로 조성된 것이리라.

비로봉을 가장 가깝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입석사를 경유하는 길이라서 그런지 이 곳엔 등산객들이 자주 보인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오더니 잠시 아이젠을 벗고는 깊숙이 참배한다. 마애여래좌상에서 20m정도 돌아 나오니 올 때 보았던 입석대가 나온다. 높이 50m의 절벽 위에 10m높이로 우뚝 서있는 정면에서 보면 네모꼴 바위다. 입석대 앞쪽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입석사의 대웅전과 삼성각이 층층으로 눈속에 묻혀 있다.

 

답사를 마치고 대웅전에 들려 오늘의 답사를 안전하게 가피 해 주신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자가발전기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 전기선로가 수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주지 스님이 내려가실 채비를 하시면서 하산 할거면 탑승하라 하신다. 발목이 시큰거리는 나로써는 하산시에도 탑승을 배려해 주신 스님이 부처님으로 보인다. 덕분에 눈 속에서 수월하게 답사를 마칠 수 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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