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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23-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나의 어깨를 죽비로 내친 마애불

 

(시사1 = 김재필 기자)경북지방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봉화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자리한 높은 산과 깊은 골이 많아 자연청정지역으로 요즘은 휠링차원으로 찾는 이가 많아졌으나 전에는 산세가 험한 지역적 특징으로 찾는 이가 적었던 상당히 오지였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를 나와 지방도 915호를 타고 봉화 시내에서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으로 가는 길을 가다보니 갑자기 넓은 들판이 나온다.

 

물야면 북지리는 다른 오지에 비해 낙동강의 상류지역으로 내성천이 흘러 다른 산간지역에 비해 수자원이 풍부하여 논농사가 잘되고 사과, 인삼을 재배하는 평야지대다.

 

잠시 차를 세우고 앞을 올려다보니 태백산맥의 한켵을 차지한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골산(283.4m)이 나즈막하게 길게 누워 있다.

 

이정표를 따라 북지교를 를 건너니 평지가 끝나는 호골산 기슭에 신라 진덕여왕때 창건했다는 지림사가 나온다.

 

신라시대에 지림사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남쪽의 경주와 같은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한때 스물일곱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다던 지림사는 넓은 경내에 비해 초라하게 퇴락 되어 있었다.

 

중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는 설과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라 보다 멀리 서광이 비치는 곳에 지었다는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설이 있으나 일주문도 없는 경내에 들어서니 축구장 크기의 넓은 경내에 한쪽으로 대웅전, 원통전, 마애불 보호각 등 전각들이 띄엄띄엄 배치된 것을 보니 도량이 황량하게 느껴져 불국토의 찬란했던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마애불은 1947년 비구니 스님이 꿈에서 부처님을 뵙고 다음 날 지림사 터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덤불로 뒤덮히고 아래는 땅에 묻혔던 걸 발견한 후 불상의 보존 관리를 위하여 보호각 1동을 신축하여 실내로 모셔 1,400년만에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왔다.

 

그 후 1949년에 권보훈이라는 승려가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우고 전통을 유지하다가, 2009년에야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인 지림사로 개명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다시 지어 옛 지림사의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마애불 보호각은 입구에서 보아 왼쪽에 위치해 있다. 높이 5m, 너비 4m의 커다란 암반에 새겨진 높이 4.3m의 거대한 불상이다.

 

자연암벽을 파서 만든 감실은 멸실되었으나 불신은 원각의 고부조로 새겼다. 기반이 되는 암반으로부터 가장 높게 튀어나온 부분은 무려 1.8m나 된다고 하니 바위속에서 부처가 나 앉은 것처럼 보인다.

 

두상은 불신과의 비례가 좀 맞지는 않으나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 큼직하며 방형의 양감이 풍부한 얼굴은 풍화와 침식을 비킬 수 없었는지, 너무 심하게 마멸되어 자세한 표정을 읽기는 어렵지만 입가엔 고졸한 미소가 옅게 드리워져 있고, 눈의 동공이 파여 있는데 이는 근처 영주의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신암리 마애삼존불에서도 볼수 있으니 이 지역의 잘못된 신앙(미신이거나 조선시대의 몰지각한 유가들의 행위등)인들이 저질러 놓은 훼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짠한 마음이 든다.

 

허나 불신은 당당한 체구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여원인의 수인을 취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손이 안 보여 두리번 거려보니 손목부터 떨어져 좌대 옆에 따로 놓여있고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왼손은 아래를 향한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불신의 의상도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그 형체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양 어깨에 걸쳐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 형태로 새겨져 왼팔을 전체적으로 덮고 쭉 이어져 내려와서 가부좌를 튼 양다리 및 무릎을 지나 대좌까지 늘어져 있어 신라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 양식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머리 뒤의 두광과 몸체 뒤의 신광이 모두 존재하는데, 애처롭게도 두광은 좌측의 절반이 깨져 반원 상태로 남아 있고, 우측에는 2구의 화불(化佛)과 연꽃 무늬 장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조각 당시에 화불들은 모두 연꽃 대좌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 연꽃 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광의 경우, 본 마애불상 좌우편의 상하로 화불이 둘씩 있어 4구가 있는데. 이 역시도 전체적으로 마멸된 정도가 심해 상세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다.

 

이 마애불의 조성 시기나 경위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불상의 얼굴이나 의상의 표현 기법이 근처의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보물 제 221호) 및 영주 신암리 마애삼존상(보물 제 680호)과 조각수법이 비슷한 걸로 보아 학계에서는 실제 조성 시기를 대략 7세기 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

 

7세기 후반은 660년에 백제, 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676년 대동강 이남에서 당나라 군대를 모두 몰아내어 명실공히 완전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시기다. 통일신라는 이 때부터 태평세월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주의 두 마애불과 이곳의 마애불이 이 때 조성된 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국태민안을 빌기 위한 발원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3곳의 마애불들이 농사에 쓰이는 물이 흐르는 낙동강 상류인 내성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걸로 보아 농부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호족들이 조성한 것일까? 마애불은 나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내부촬영을 마치고 보호각을 나와 10여미터 앞에서 전경을 촬영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보살이 두 분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삼배를 올리고 있다.

 

장중한 마애불앞에 선 그들을 보니 한없이 작아 보인다. 그건 크기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1,400여년의 세월이란 시공을 넘어 온 마애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불심으로 회오리쳐 그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님 부처님께 무슨 기도를 하셨어요?” “기도는 무슨 기도? 그냥 삼배만 올리면 되지예. 부처님께 원하는 게 있다는 건 그 만큼 잘못 살아왔다는 것인디.. 그러면 부처님앞에 부끄럽지예. 지금까지 별 탈없이 잘 살아온 건만도 고마운 일이제” 죽비가 어깨를 내려친 것 같다.. 촌부들의 이 말에서 이제껏 기도의 의미를 여기서 깨닫게 되었으니..

 

갑자기 이 곳까지의 여정으로 지쳤던 심신이 일제히 곤두박질치더니 한 마리 나비처럼 가벼워져 나를 따라다니던 상념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나는 경내를 벗어나 시공을 넘어 마애불을 조성한 석수쟁이를 만나러 나섰다.

 

간절한 불심에 의해 손끝에 핏물이 들어도 아픔을 모르고 화강암에서 부처를 모셔내온 그의 기도가 옹이진 긴 세월을 건너와 나를 만난다.

 

그러나 지금 상처투성이인 마애불을 보고 그의 마음은 어떤 심정일까? 그는 풍화와 침식으로 일그러진 얼굴, 떨어져 나간 오른손, 어렴풋한 미소를 쳐다본다. 싸한 겨울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마애불은 다시 나에게 장엄한 위엄 뒤로 인간적인 고뇌로 크게 다가온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헤집는다. 일상의 번잡함과 나를 흔드는 것들을 정지시키고 나를 찾던 여느 때와 달리, 하나의 작은 생명체가 되어 다시 마애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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