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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훈의 詩談/60] 박인환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이번 칼럼에서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 시인은 왜정시대에 출생해 해방을 맞이했고, 6·25 남북전쟁을 경험한 세대로 동족간 비극을 겪은 인물이다. 연장선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불안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혼란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문장을 구사해 시를 만들어 그 시대 때 문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 시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소개하는 이유로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과도 연관이 깊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날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전립선 관련 지병을 앓고 오랜생활 투병을 했으나 최근 병세 악화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필자의 기억 저편에도 노 전 대통령은 ‘보통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직선제 대통령에 선출된 게 뚜렷하다. 노 전 대통령의 부고를 접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유서에는 자신의 지난 과오를 비는 게 골자였다고 한다. 또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달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퇴임 후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및 ‘수천억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다. 그러다가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고, 별세 전까지 추징금 미납 논란으로 구설수에 올랐다가 뒤늦게 완납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201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2018년)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이 영면하자 ‘87년 체제의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평가가 고개를 들고 있다. 노 전 대통령 별세 관련 보도들을 접해서일까. 박 시인의 ‘세월이 가면’ 시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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