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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14-보타사 마애보살좌상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보살상

 

(시사1 = 김재필 기자) 

 

​​마애보살의 얼굴 표정이 아침에 다르고,

낮에 다르고,

밤에 다르다.

 

비가 내릴 때 다르고,

눈이 내릴 때 다르다.

바람이 불 때 다르다.

구름이 지나갈 때 다르고,

달이 지나갈 때 다르다.

 

​어떤 마음일까.

​합장을 하고 절을 하면서,

어느 사람은

포근하다고 말한다.

어느 사람은

무섭다고 말한다.

보는 사람 마음대로다.

다시, 합장을 하고 절을 한다.

 

한결같은 천년의 마음이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하 마애불)을 찾아 갔을 때 만난 시인 윤희상의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이란 시다.

 

 

보타(普陀)란 ‘관세음보살’을 일컫는 말로 중국 저장성(浙江省) 주산군도(舟山群島)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당나라 때에 시작된 관음 신앙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보타>라는 이름의 사찰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로 나와 고려대학교 병원을 올려다 보며 고려대학교를 우측으로 끼고 올라 가면 개운사 입구의 일주문 옆으로 난 길로 100미터를 더 올라가면 먼저 대원암이 보인다.

 

대원암(大圓庵)은 개운사의 산내 암자로 1845년(헌종 11)에 지봉우기가 창건했다.

이 곳에서 근대불교계의 대강백인 영호정호(映湖鼎鎬, 1870~1948)가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석학들을 배출했다.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운허·고봉·청담·성능·철운·운성·운기·청우·남곡·경보 등의 출가 제자와 석정 신석정·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및 동경 삼걸로 불리던 벽초 홍명희·춘원 이광수·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산강 변영만·가람 이병기·위당 정인보·범부 김정설·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 곳에서 탄허스님은 하루에 원고지 100매씩 10년 동안 화엄경 80권을 6만2천 5백매로 번역하여 <신화엄경합론>을 펴낸 곳이다.

 

대원암을 우측으로 끼고 경사진 길을 따라 50여미터쯤 더 올라 가면 절집이라기보다 시골의 여염집 같은 개운사의 암자(칠성암)인 비구니 사찰인 보타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마애불은 대웅전 뒷곁 큰 바위의 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1992년 6월 28일에 서울문화사학회가 정기 답사 때 발견하여 이를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 각각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여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한 결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89호‘로 지정 되었다가 2014년 7월 2일에 보물 제 1828호로 승진했다.

 

높이 5m, 폭 4.3m 되는 거대한 이 마애불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보관을 쓰고 양쪽에 도깨비 방망이 같은 영락장식이 귀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통통하나 갸름한 얼굴에 이마는 좁고 양미간에는 동그란 백호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활처럼 휘어진 눈썹과 약간 치켜 올린 긴 눈은 노란 바탕에 검은 눈동자가 조금은 날카로워 카리스마가 느껴지고, 코는 콧방울을 강조하여 당당함을 표현하였고 인중은 뚜렷하고 미소를 띌듯 말뜻한 입 또한 얼굴 전체에 비례해 작은 오물형이어서 성정이 까다롭게 보여 전체적인 인상이 중생을 사랑하는 관음이나 보살의 자애로운 표정이 아닌 어찌보면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지배자인 남성상이다.

 

보편적으로 관음(觀音)은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慈悲))를 떠 올린다. 자(慈)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아기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이고, 비(悲)는 자식의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든 덜어 주려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마음을 뜻한다. 이것이 관음상에서 모성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옥천암마애불이 여성상이라면 이 곳 보타사마애불은 남성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애보살좌상 왼손 옆엔 나무금강회상불보살(南無金剛會上佛菩薩)이라고 쓴 다른 마애불에선 보지 못한 원패(불단에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새겨놓은 패)가 보인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고려말쯤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 전문가들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아 함께 고려 말 불교미술의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평가한다.

 

촬영중에 단정한 여성한 분이 참배를 한다.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인 면모가 풍겨 물어 보니 스리랑카에서 온 불자라고 소개한다.

불심이 그녀를 한국으로 인도 한 것이리라.

그녀는 기도를 마친 뒤 좌측에 있는 관음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다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 하단 옆에 작은 물 웅덩이 흔적을 보았다.

 

옛날엔 마애불을 참배 후 약수를 마셨다는 전언이 생각나서 다가가 보니 물기가 전혀 없어 흔적만 남은 작은 웅덩이 같은 것이 보인다. 예전엔 산 위에서 물이 제법 흘러 내렸을터,

 

집에 돌아와 자료를 검색 해 보니 독일의 성 베네딕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서울사진‘책에 수록된 자료를 근거로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발행한 근대의 ’서울사진‘첩에서 물이 흘려내렸던 증거의 사진을 서울역사 박물관 자료실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다음날 서울역사박물관에 들러 그 책을 찾아 열람실에서 찬찬히 들여다 보니 구한말 당시 서울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상을 찍은 것으로 마애불 사진은 ’옥천암 마애불‘ 및 ’도선사 마애불(보호각을 짓기 전이라 시원스레 보인다)‘을 포함하여 3기의 마애불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사진은 독일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Erzabtai St. Ottilien)’의 총아빠스(Archiabbas, 대수도원장)인 노베르트 베버 신부(Norbert Weber OSB, 1870~1956)가 선교차 극동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에 체류하면서 1911년에 촬영한 것으로 그가 찍은 마애불 사진의 왼쪽 하단을 보니 약수터를 찾은 3명(차림으로 보아 동행한 선교사들인 것 같음)중 뒤에 있는 사람은 물통 들고 있고 앞사람은 사발을 들고 흘러내리는 물을 받고 있다.

 

이렇듯 약수의 효험을 알고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 왔을 터인데 어느 시점에서 약수가 끊어진 것은 마애불 바로 위를 지나는 도로(북악산길)로 인해 수맥이 끊어진 탓이리라.

허나 이뿐이랴, 이 도로 위를 지나는 많은 차량들의 진동으로 인해 마애불에 손상이 가해지지 않을지 염려 된다.

 

일상의 편의를 위해 개발되는 것은 좋지만 문화재를 위해(危害) 할 수 있는 점은 없는지 사전 검토를 철저히 하여 시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마애불(문화재) 한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애불 왼손 옆엔 나무금강회상불보살(南無金剛會上佛菩薩)이라고 쓴 다른 마애불에선 보지 못한 원패(불단에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새겨놓은 패)가 보인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고려말쯤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전문가들은 옥천암 마애불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아 고려 말기의 불교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탐사촬영을 마치고 서울시 지도를 펼쳐 놓고 이제까지 찾아 다닌 서울의 마애불 위치를 짚어보니 경복궁을 중심으로 옥천암마애불은 북악산 서북쪽 끝에, 이 곳 보타사 마애불은 동북쪽에 있어 지리적으로 대척점에 유사한 마애불이 동시대에 조성되었다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 하나 자세한 조성연대나 연유등이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추측에 의존할 뿐인 것이 안타까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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