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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 마애불과의 만남 1

시간의 정지시킨 미소-경주 불곡 감실 마애여래좌상

 

(시사1 = 김재필 기자)

온갖 사물은 순간순간 변한다.

한순간도 머무는 것이 없다.

그것은 마치 꽃잎에 매달린 이슬과 같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으며

모래로 쌓은 담과 같다.

- 보문경 중에서 -

 

헌데 1,000여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있다.

사바세계를 내려다 보는 근엄한 모습으로, 또는 어머니와 같은 푸근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천상에서 막 내려와 속세의 대중을 향해 웃는 익살스런 모습으로 바위나 암벽에 돋을새김이나 선각으로 조성된 마애불이다.

 

몇년전 나는 사진촬영차 신라의 옛 수도인 서라벌. 경주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급속하게 전파된 신라의 불교는 국교로까지 굳혀져 정치적으로는 ‘호국불교’로 문화적으론 ‘불교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따라서 로마가 서양에서의 야외 박물관이라면 경주 남산 역시 동양의 야외 박물관 이라 견줄 수 있음에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교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남산은 길이 약8km, 폭 약4km의 산줄기엔 불상 80여채, 탑 80여기, 절터 110여개소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나는 왕릉등을 촬영하고 삼릉계곡을 갔다 오다가 지인에게서 근처에 ‘할매부처’가 있다는 말에 그 곳을 안내 받아 “불곡 감실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가 보았다.

 

유적이 있을만한 장소로 보이지 않는 야트막하고 양옆으로 산죽이 자라고 있는 길을 따라 10여분을 올라 가니 시야가 넓어지면서 바위가 보인다.

 

높이는 3.2m정도 넓이 4.5m되는 바위에 홍예형(虹霓形)으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부처를 조각하여 돌로 된 집 속에 앉아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후덕하게 생긴 얼굴에 두건을 쓴 머리, 뭉퉁하나 친근하게 생긴 코, 갓 시집간 큰누이의 초생달 같은 눈썹, 아래로 지긋히 감은 눈에서는 감실안에서 선정하는 수행자 모습에서 불심이 깊었던 석공이 바위를 쪼아서 만든 게 아니라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부처를 밖으로 끌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 지명이 불곡.인 것도 이 마애불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왜 이 마애불은 ‘할매부처’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을까?

여타 마애불들은 대개 사바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 높은 곳에 조성 되어 있는데 이 마애불은 작은 고을 언덕의 바위에 조성한 걸보니 왕실이나 고관들이 참배하는 큰 마애불을 친견할 수 없어 이 곳 마을 사람들이 이 조성하여 위안안처를 마련한 것 같다.

 

따라서 이 모습이 부처와 동네 할머니의 얼굴이 동시에 오버랩된 것으로 보이기에 삼신할매를 연상시켜 ‘할매부처’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마애불이 조성된 시기가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는 학계의 의견으로 보아 그때는 무속신앙과 불교신앙이 약간은 혼재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할머니 보다는 중년의 아지매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아마 지금보다 수명이 짧았던 그 당시엔 이 모습이 할머니로 보였던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닌가?

민초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팍팍하고 근심거리가 많다.

 

감실에서 선정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에서 집안의 평안을, 화랑이 되어 전장으로 나간 아들의 건강과 전승을, 멀리 일하러 나간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 감실 마애여래좌상.

 

작은 기쁨이 배어 있는 듯, 애잔한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한 얼굴에서 슬픔은 슬픔이 아니고 기쁨은 기쁨이 아닌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무한의 표정.

 

천년의 미소로 다가오는 감실의 마애불은 깊숙이 앉아 있어 얼굴은 항상 그늘에 가려져 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동짓날 전후인데 동지(冬至)는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로서, 태양 황경이 270도가 되는 때로 해의 고도가 가장 낮아 감실에 앉아 있는 마애불의 얼굴까지 해가 비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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