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국권회복을 위한 고종의 마지막 외교정책, 헤이그특사 파견

  • 등록 2016.06.01 11: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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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헤이그프로젝트, 평화의 염원을 담아 헤이그로 향하는 33인의 대장정

최근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6주년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거사 직전 3일간의 흔적을 따라,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영화와 같은 생생한 모습으로 재현하고 숨겨져 있던 인간적인 모습까지 전달하며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

 

일제 강점기, 어둡고 차가웠던 비극의 시대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위인의 결단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구한 말,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멀고 먼 타국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다.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유럽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국임을 주지시켰던 그들.

 

이준, 이위종, 이상설 3인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돼 이 곳에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을 알리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고종은 1907년 4월 20일, 조선 최초의 평리원 검사였던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제 2차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은 헤이그 회담)에 나가 자주권을 침해받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조처했다.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의 밀령을 가슴에 품고 서울을 떠나 이상설, 이위종 열사와 합류한 뒤,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과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르는 장구한 여정에 올랐다.

 

특사 일행은 먼저 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와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연달아 만나며,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여 특사 3인을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시키고 일본의 협박 때문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파기를 위해 의제에 상정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개최국인 네덜란드와 헤이그 특사파견을 도왔던 러시아조차 협조적이지 않았다. 이유인 즉 슨,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하였기에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특사가 참여할 계획을 알고 있던 일본과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특사일행은 포기하지 않고, 비공식 경로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주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한편, <평화회의보>에 그 전문을 발표하였다.

 

특사들은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하며 청중의 공감을 샀다.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도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일궈낸 활약에도 불구하고, 특사 3인은 결국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거부되었다. 이는 당시의 서구 열강들이 국제 정세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자세만을 취하며 어느 누구도 발 벗고 나서 자주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편에 서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맞닥뜨린 이준 열사는 의분하던 끝에 7월 14일 자결한다. 특사일행은 뜻을 함께했던 동지를 잃은 슬픔을 마음에 묻으며, 이준 열사의 한 맺힌 유해를 헤이그 외곽의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그토록 대한제국의 독립을 꿈꾸던 이준 열사는 광복 후 1963년 한국 수유리 묘소에 안장되게 되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침략 야욕을 규탄하는 애국의 변을 토하고 장렬하게 생을 마감한 일성 이준 열사, 그는 대한제국 말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고관대작의 아들도 아닌 처지에 홀로 서울에 와서 대쪽 같은 삶을 살았다. 우국지사였으며, 교육문화운동의 선구자였던 그는 우리 역사 최초로 민권과 자유 그리고 법치와 준법을 설파하고 실행한 민주시민운동가였다. 우리 역사에서 손꼽힐 만큼 청백리의 삶을 산 그는 당시 국민들에게 호법신으로 불렸을 정도로 국민들의 신망이 높았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잣대를 들이대어 부패와 관리와 친일을 단죄한 검사의 사표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이준 열사 자결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유관순의 3.1 독립운동 등 적극적인 행적은 그들보다 앞서 헤이그에서 대한제국의 실태를 세계에 알리고자 목숨을 내놓은 특사들의 노력과 피가 밑거름 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온 나라가 국가를 잃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그 때, 우리 민족들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했던 것이 바로 운동선수들의 대회 우승 소식이었다.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보다 앞서 민족의 자전거 영웅으로 불리던 엄복동 선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20년대 한일전 양상을 띄던 자전거 대회에서 매번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거머쥔 엄복동은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이라는 동요가 전국에서 유행했을 만큼,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었다.

 

일본인들이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개최한 대회에는 일체 참가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았던 엄복동. 그는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다 일본인들에게 탄압을 당하고 체포까지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1932년까지 자전거 대회 우승으로 민족들에게 희망을 전하기를 계속했다.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을사조약.

 

억압받던 한국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특파된 3인 열사들의 넋을 기리며, 비참한 현실 속에서 ‘승리’의 기쁨을 통해 독립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도운 매개체인 자전거로 <2016 헤이그프로젝트> 대장정을 시작하려 한다.

 

이번 <2016 헤이그프로젝트>는 글로벌 프로모션 전문업체 케이커뮤니케이션(대표 김윤희)과 신화통신이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특사들이 그토록 외쳤던 자주독립이라는 염원을 담아, 세계에 대한제국을 알리기 시작한 바로 그곳, 헤이그에 도달하기 까지 특사 3인의 발자취를 따르며 세계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헤이그 프로젝트의 참가인원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대표 33인으로 구성 될 예정이다. 더불어 테스트를 통해 구성된 최적의 선수단이 우리의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민간사절단의 역할을 할 것이다.

 

대표단은 헤이그특사 3인의 행적을 따라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발트 3국을 지나 폴란드, 그리고 통일의 본을 보여준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장정을 진행하게 된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헤이그특사의 숭고한 희생이 깊은 의미로 되새겨지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참여하는 선수단 뿐만 아니라, 선수단이 거치는 각 나라들의 모든 사람들에게 109년 전 헤이그특사들이 그토록 전하고자 했던 세계평화라는 뜻을 전하고 전 세계가 한 마음 되어 세계평화를 이루어 내는 시작이 되길 꿈꾼다.

 

<‘이준 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 출판사 서평 발췌>

 

오나경 기자 bellosterne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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